영유권 이야기를 잠시 멈춘다. 이 편은 사람의 소유 다툼이 아니라, 그 다툼의 와중에 지구에서 영원히 사라진 생명의 이야기다. 독도는 동해 강치 — 바다사자의 일종인 일본강치(Zalophus japonicus) — 의 최대 번식지였다. 완만한 바위와 풍부한 물고기, 천적 없는 절해의 환경. 울릉도 사람들은 강치를 "가제" 또는 "가지"라 불렀고, 독도의 서도 곁 바위섬에는 지금도 가제바위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조선 문헌에도 흔적이 있다 — 정조 대 수토관 한창국의 보고(일성록, 1794)에 울릉도 일대에서 "가지어(可支魚)"를 잡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19세기까지 동해의 강치는 수만 마리로 추정됐고, 독도는 그 심장이었다. 그리고 1904년, 나카이 요자부로가 왔다. 앞 편에서 본 대로 그의 영토편입 청원의 목적 자체가 강치잡이 독점권이었다 — 편입이 이뤄지자 그는 다케시마어렵합자회사를 세워 시마네현으로부터 독점 어업권을 얻었다. 이후의 숫자는 일본 측 기록으로 남아 있다. 편입 직후 몇 해 동안 연간 포획이 수천 마리에 달했고 — 절정기 한 해 3천 마리 안팎이라는 집계가 전해진다 — 가죽은 가방과 군용 배낭으로, 피하지방은 기름으로, 살과 뼈는 비료로 가공됐다. 새끼 강치는 산 채로 잡혀 서커스단과 동물원에 팔렸다. 어미를 눈앞에서 도살하고 새끼를 산 채로 실어가는 조업이었다는 당대 목격담이 울릉도 주민들의 구술로 전해진다. 번식지 한복판에서의 무제한 포획 — 개체군 붕괴는 정해진 수순이었다. 1910년대에 이미 연간 포획량이 급감했고, 1930년대에는 수십 마리 수준으로 무너졌다. 씨가 마르도록 잡은 뒤에야 조업이 시들해졌다. 광복 후에도 강치는 돌아오지 못했다. 1950년대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이 이따금 수십 마리를 목격했다는 증언, 1960년대 어민들의 산발적 목격을 끝으로 한국 해역에서 자취를 감췄고, 일본 쪽에서도 1970년대 홋카이도 근해 목격 보고를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겼다. 일본강치는 이후 국제자연보전연맹(IUCN) 적색목록에서 절멸(EX) 종으로 분류됐다 — 20세기가 시작될 때 수만 마리였던 종이, 20세기가 끝나기 전에 지구에서 지워진 것이다. 한국 정부는 2000년대 이후 강치를 독도 생태 복원의 상징으로 삼아 기념물과 조형물을 세우고 러시아 등지의 근연종 도입 가능성까지 검토했으나, 절멸한 종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 이야기를 독립된 장으로 다루는 이유가 있다. 강치는 독도 편입의 "동기"라는 각주로만 소비되기 쉽지만, 시선을 뒤집으면 이렇다 — 독도가 인간의 지도 위에서 국경 분쟁의 좌표가 되어가는 동안, 이 섬의 원래 주인이던 생명은 그 분쟁의 첫 번째 전리품으로 도살당해 사라졌다. 태정관지령도 칙령 41호도 결국 종이 위에서 복원되고 다투어질 수 있지만, 강치만은 어떤 문서로도 복원되지 않는다. 독도의 역사에서 진정으로 종결된 유일한 장(章)이며 — 그래서 이 시리즈는 강치의 자리를 사람의 논쟁과 나란히, 같은 크기로 남겨둔다.
강치의 절멸 — 이 섬에서 벌어진 가장 되돌릴 수 없는 일
출처
- [기록보존소] 일성록 — 수토관 한창국 보고 (가지어 기록)
- [기록보존소] 다케시마어렵합자회사 포획 관련 일본 측 기록
- [정부·공공기관] IUCN 적색목록 — Zalophus japonicus (절멸)
- [정부·공공기관] 해양수산부 독도 강치 복원·기념 사업 자료
이 글은 독도, 기록의 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