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권2 무왕조가 전하는 이야기다. 백제 무왕의 어릴 적 이름은 서동(薯童), 마를 캐어 팔아 생계를 잇던 아이였다. 그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 서울로 갔다. 마를 아이들에게 나눠주며 환심을 산 뒤, 노래 하나를 지어 부르게 했다.
善化公主主隱 — 선화공주님은 他密只嫁良置古 — 남몰래 정을 통해 두고 薯童房乙 — 서동방을 夜矣卯乙抱遣去如 —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노래는 서울 안에 퍼져 궁궐까지 들어갔다. 백관이 힘써 간하여 공주는 먼 곳으로 귀양을 가게 됐다. 떠날 때 왕후가 순금 한 말을 주었다. 귀양길에 서동이 나타나 절하며 모시고 가겠다 하니, 공주는 그가 누구인지 모르면서도 우연히 믿고 좋아하며 따라갔다. 뒤에야 노래의 영험을 알았다.
백제에 이르러 공주가 금을 내놓으며 생계를 꾸리자고 하자 서동이 웃었다. "이게 무엇이오?" 마를 캐던 곳에 흙처럼 쌓아둔 것이 그것이었다. 두 사람은 그 금으로 인심을 얻어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없는 사실을 있게 만드는 노래】 이 작품이 흥미로운 것은 노래의 작동 방식이다. 서동은 사실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사실이 아닌 것을 노래했다. 그런데 그 노래가 퍼지자 공주는 정말로 궁에서 쫓겨나고, 정말로 서동과 함께 가게 된다. 없던 일이 노래 때문에 있는 일이 됐다.
학계가 이 작품을 주가(呪歌)로 분류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원하는 상황을 미리 진술함으로써 그것을 실현시키는 것 — 고대 주술의 기본 원리다. 「구지가」가 "머리를 내놓아라"라고 명령했다면, 「서동요」는 "이미 그렇게 되었다"라고 단정한다. 명령이 아니라 기정사실화라는 점에서 한 단계 더 교묘하다.
동시에 이 노래는 참요(讖謠), 곧 정치적 예언 노래의 성격도 띤다.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나라를 흔든다는 구조는 이후 한국사에 반복해 등장한다. 조선의 「미나리요」나 정감록 계열 노래까지, 권력을 겨냥한 익명의 노래는 늘 아이들 입을 빌렸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사실인가】 문제가 많다. 무왕(재위 600~641)과 진평왕(재위 579~632)은 동시대 인물이지만, 당시 백제와 신라는 전쟁 중이었다. 무왕은 재위 기간 내내 신라를 공격했다. 적국의 왕자가 적국 수도에 잠입해 공주를 데려간다는 설정은 정황상 성립하기 어렵다.
그래서 여러 대안이 제기됐다. 무왕이 아니라 동성왕(재위 479~501) 때의 일이라는 견해가 있다. 실제로 동성왕은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었다(493년, 이찬 비지의 딸). 또 주인공을 무왕이 아닌 원효로 보거나, 백제 무령왕 설화의 변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2009년 익산 미륵사지 석탑 해체 과정에서 나온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는 논쟁을 오히려 키웠다. 미륵사를 발원한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이라고 명시돼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는 미륵사 창건을 무왕과 선화공주의 일로 적었는데, 금석문은 백제 귀족 사택씨의 딸을 지목한 것이다. 이를 두고 선화공주 설화 자체가 허구라는 견해와, 무왕에게 여러 왕비가 있었고 선화공주는 그중 하나였다는 견해가 갈린다.
【그래도 남는 것】 사실성 논쟁과 별개로, 이 노래가 향가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분명하다. 현존 향가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며, 가장 짧은 4구체이고, 민요가 향가로 정착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다.
무엇보다 이것은 아이들이 부른 노래다. 승려나 화랑의 세련된 사뇌가가 아니라, 거리에서 아이들이 흥얼거린 짧은 노래가 문헌에 남았다. 향가의 출발점에 궁중이 아니라 저잣거리가 있었다는 사실은 기억해둘 만하다.
【그때 신라와 백제는】 진평왕대(579~632)는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뒤 백제·고구려 양쪽의 공격을 받던 시기다. 선덕여왕의 아버지이자 김춘추의 외조부인 진평왕은 오랜 재위 동안 수·당과의 외교를 강화하며 위기를 넘겼다. 같은 시기 백제 무왕은 익산 경영에 힘을 쏟아 미륵사를 세웠다. 「서동요」가 그리는 백제-신라의 혼인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을지 몰라도, 두 나라가 서로를 그토록 의식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은 설화 너머에서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