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된 노래를 우리 글자로 적을 수 없던 시대가 있었다. 한글 창제는 15세기다. 그전까지 우리말 노래를 남기려면 한문으로 번역하거나 — 「공무도하가」와 「황조가」가 그랬듯 — 아예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신라 사람들은 세 번째 길을 찾아냈다. 한자의 뜻(訓)과 소리(音)를 섞어 우리말 어순 그대로 적는 방식, 향찰(鄕札)이다. 예컨대 뜻을 나타내는 부분은 한자의 새김으로, 조사나 어미 같은 문법 요소는 한자의 음으로 적는다. 남의 문자를 빌려 자기 말을 적는 이 위태로운 곡예 덕분에, 우리는 천 년 전 사람들이 실제로 어떤 말로 노래했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적힌 노래를 향가(鄕歌)라 부른다. 중국 시가에 대응하는 "우리 노래"라는 뜻이다.
【남은 것은 25수】 현재 전하는 향가는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11수, 모두 25수다. 고려 예종의 「도이장가」(1120)와 정서의 「정과정곡」을 포함시키면 27수가 된다.
25수 목록은 이렇다. 『삼국유사』 수록 14수 — 서동요(서동, 진평왕대), 혜성가(융천사, 진평왕대), 풍요(민중 공동작, 선덕왕대), 원왕생가(광덕 또는 그 아내, 문무왕대), 모죽지랑가(득오, 효소왕대), 헌화가(견우노인, 성덕왕대), 원가(신충, 737), 도솔가(월명사, 760), 제망매가(월명사, 경덕왕대), 찬기파랑가(충담사, 경덕왕대), 안민가(충담사, 경덕왕대), 도천수관음가(희명, 경덕왕대), 우적가(영재, 원성왕대), 처용가(처용, 879). 『균여전』 수록 11수는 균여대사(923~973)의 「보현십원가」 연작이다.
원래는 훨씬 많았다. 진성여왕 때 각간 위홍이 향가를 집대성한 『삼대목(三代目)』을 편찬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책은 전하지 않는다. 제목과 유래만 남고 가사를 잃은 노래들 — 실전향가(失傳鄕歌) — 도 상당수다. 「양산가」, 「신공사뇌가」, 「현금포곡」 같은 것들이다.
【누가 불렀나】 향가의 중심 작가층은 화랑과 승려다. 충담사·월명사 같은 이름이 반복해 등장한다.
다만 이들의 정체에는 논쟁이 있다. 균여를 빼면 『해동고승전』 같은 문헌에 이름이 보이지 않고, 옷차림이나 행색으로 보아 이름난 고승이 아니라 동냥승 내지 가무승 계층일 가능성이 지적된다. 월명사는 승려이면서 낭도였고 주술적 직능도 가진 것으로 보여 융천사와 함께 주술사로 짐작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상당수 작가명이 실존 인물이 아니라 배경설화에 맞춰 후대에 붙인 가공의 이름이라는 견해도 있다. 충담사(忠談)는 왕에게 "충성의 말"을 바친 노래의 작가라서, 희명(希明)은 눈먼 아이의 "밝음을 기원"한 노래의 작가라서, 융천사(融天)는 하늘의 괴변을 "융화시킨" 노래의 작가라서 그렇게 불렸다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작자가 실재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고, 이름을 잃은 채 전해오다 설화에 맞춰 다시 명명됐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형식 — 4구체, 8구체, 10구체】 향가는 보통 세 형식으로 나눈다. 4구체는 서동요·헌화가·풍요·도솔가, 8구체는 모죽지랑가·처용가, 나머지는 10구체다.
오래된 통설은 진화론적이다. 민요에서 온 4구체가 가장 오래됐고, 감정이 복잡해지며 길어지다 삼국통일기에 10구체 사뇌가(詞腦歌)로 완성됐다는 것이다. 10구체는 4행+4행+2행의 3장 구조를 갖고, 마지막 2행(낙구)은 "아으" 같은 감탄사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 가설에는 반례가 있다. 가장 이른 진평왕대에 4구체 서동요와 10구체 혜성가가 나란히 존재하고, 신라 향가 중 가장 늦은 처용가(879)는 오히려 8구체다. 게다가 8구체는 4구체의 두 배가 아니라 10구체의 압축형이라는 분석이 나오면서, 10구체에서 8구체로 줄어들었다는 역방향 가설까지 제기됐다. 형식의 발달사는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성격 — 주술인가 불교인가】 향가의 성격도 두 축에서 논의된다. 주술적 측면에서는 도솔가·서동요·혜성가·원가·처용가가 주가(呪歌)로 분류되고, 불교적 측면에서는 도솔가가 미륵신앙, 원왕생가가 정토사상, 도천수관음가가 관음신앙, 보현십원가가 화엄사상과 연결된다.
문제는 같은 작품이 양쪽 목록에 동시에 오른다는 점이다. 도솔가·처용가·혜성가가 특히 그렇다. 이는 신라 사회가 무불습합(巫佛習合), 즉 무속과 불교가 뒤섞인 문화 구조였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하나를 택할 문제가 아니라 둘이 겹쳐 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
최근에는 세 번째 축이 제시된다. 향가의 중심 담당층이 화랑집단이고 그 사상적 기반이 풍월도(風月道)라는 점에 주목하는 관점이다. 풍월도는 선도(仙道)를 중심으로 무교와 유·불·도 삼교를 포괄하므로, 향가에 보이는 주술성·불교성·유교성이 각각 따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의 사상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읽는 데 백 년이 걸렸다】 향가에는 다른 어떤 고전에도 없는 특수한 사정이 있다. 원문이 남아 있는데도 읽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향찰은 표기 규칙이 전해지지 않아, 한자를 언제 뜻으로 읽고 언제 소리로 읽어야 하는지 알 방법이 없다.
19세기까지 향가를 해독하려는 시도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25수 전체에 대한 최초의 해독은 일본인 학자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의 『향가 및 이두의 연구』(1929)였다. 뒤이어 양주동이 『조선고가연구』(1942)로 그 경지를 넘어섰고, 이 책은 오랫동안 해독의 정본 역할을 했다. 이후 지헌영·이탁·김선기·서재극·김준영·김완진·유창균·강길운 등의 작업이 이어졌고, 북한에서는 홍기문(1956)과 정렬모(1965)의 연구가 나왔다.
그럼에도 아직 만족할 만한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 학계의 자평이다. 그래서 향가를 다룰 때는 늘 단서가 붙는다 — 이 해석은 누구의 해독을 따른 것인가. 같은 노래도 양주동을 따르느냐 김완진을 따르느냐에 따라 뜻이 달라진다.
【이 시리즈의 지도】 이번 시리즈는 대표작 다섯 편을 다룬다. 서동요(백제 무왕과 선화공주 — 익산과 경주), 헌화가(수로부인 — 강릉 가는 길의 벼랑), 제망매가(월명사 — 사천왕사), 찬기파랑가(충담사 — 경주), 처용가(처용 — 울산 개운포와 경주).
각각 지도의 사건 카드와 연결된다. 노래가 불린 자리를 지도 위에 놓으면, 향가가 궁중의 문학이 아니라 길 위에서·절에서·바닷가에서 불린 노래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