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 — 동짓달 기나긴 밤을

1540 · 개성(송도)

조선 전기의 기녀 황진이. 본명은 황진(黃眞), 기명은 명월(明月), 개성 출신이다. 생몰년은 알 수 없고 중종 때 인물로 전한다. 직접적인 기록은 없으며 여러 일화를 통해서만 삶의 흔적이 남았다.

전하는 이야기들은 이렇다. 당대의 석학 서경덕을 흠모해 거문고와 술을 들고 자주 찾아가 시와 글씨를 배웠다. 살아 있는 부처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유혹해 파계시켰다. 박연폭포와 서경덕과 자신을 묶어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했다.

주로 연회석과 풍류장에서 지어진 그녀의 작품은 대부분 사라지고 시조 6수가 전한다. 한시로는 「박연」·「영반월」·「등만월대회고」 등이 남았다.

동짓ᄃᆞᆯ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여 / 춘풍(春風) 니불 아레 서리서리 너헛다가 /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시간을 물건처럼 다루다】 이 작품이 특별한 것은 발상 때문이다.

동짓달 긴 밤의 "한 허리"를 베어낸다. 시간을 자를 수 있는 물건으로 다루는 것이다. 그것을 봄바람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어두었다가, 임이 오신 밤에 "구뷔구뷔" 펴겠다고 한다.

서리서리는 실이나 끈을 사려 감는 모양이고, 구뷔구뷔는 굽이굽이 풀어놓는 모양이다. 감았다 푸는 대칭이 정확하다. 게다가 두 부사 모두 우리말 의태어다. 한자어를 쓰지 않고 순우리말만으로 이 정교한 이미지를 완성했다.

논리도 정연하다. 임 없는 밤은 길고 임 있는 밤은 짧다 — 이 흔한 탄식을 뒤집어, 남는 시간을 저축했다가 모자란 시간에 쓰겠다는 착상으로 만들었다. 감정을 호소하는 대신 해결책을 제시하는 방식이다.

【다른 작품들】 「청산리 벽계수야」는 성격이 또 다르다. 청산 속 푸른 시냇물아 쉽게 흘러감을 자랑 마라, 한 번 바다에 이르면 다시 오기 어렵다, 밝은 달이 빈 산에 가득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여기서 벽계수(碧溪水)는 푸른 시냇물이면서 동시에 당시 왕족 이원혼의 호이고, 명월(明月)은 밝은 달이면서 황진이 자신의 기명이다. 자연물을 노래하는 척하면서 실은 특정 인물에게 말을 거는 중의법(重義法)이다. 이 시조를 듣고 벽계수가 놀라 말에서 떨어졌다는 일화가 전한다.

「어져 내 일이야」는 회한의 노래다. 아아 내가 한 일이여, 그리워할 줄 몰랐던가. 있으라 했으면 갔으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붙잡지 않고 보낸 뒤 그리워하는 마음 — 「가시리」에서 시작된 정서가 여기서 다시 나타난다. 다만 「가시리」의 화자가 배려 때문에 못 붙잡았다면, 이 화자는 자존심 때문에 안 붙잡았고 그것을 후회한다.

【진위 문제】 황진이 작품에는 확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시조 6수 가운데 「청산리 벽계수야」·「동짓달 기나긴 밤을」·「내 언제 신이 없어」·「산은 옛 산이로되」·「어져 내 일이야」 5수는 진본 『청구영언』과 『해동가요』의 여러 이본을 비롯해 후대 시조집에 널리 전한다.

반면 「청산은 내 뜻이요」는 『근화악부』와 『대동풍아』 두 가집에만 전하고, 작가도 『근화악부』에는 무명씨로, 『대동풍아』에만 황진이로 되어 있다. 게다가 두 책의 내용이 완전히 일치하지도 않는다. 초장이 『근화악부』에서는 "내 정은 청산이요 님의 정은 녹수로다"인데 『대동풍아』에서는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으로 바뀌어 맛이 달라진다.

더 근본적으로, 황진이 작품은 모두 그녀 사후 한참 뒤의 가집에 실려 전한다. 구전되는 동안 다듬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기녀 시조라는 자리】 황진이가 문학사에서 갖는 의미는 개인의 재능을 넘어선다.

조선의 여성은 글을 남기기 어려웠다. 사대부가의 여성은 규범 때문에, 하층 여성은 문자 때문에 막혔다. 그 틈에서 기녀는 예외적 위치에 있었다. 시와 노래와 악기를 익히는 것이 직업이었고, 사대부와 대등하게 수작(酬酌)하는 자리에 있었다.

그 결과 조선의 여성 시조 상당수가 기녀의 것이다. 황진이 외에도 한우, 매창, 소백주 등이 이름을 남겼다. 이들의 작품에는 사대부 시조에 없는 것이 있다 — 사랑을 직접 말하고, 밀고 당기며, 때로 상대를 조롱한다.

동시에 그 자리의 한계도 분명하다. 이들이 글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신분이 높아서가 아니라 낮아서였고, 남은 작품 대부분이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지어졌다. 황진이의 시조가 빛나는 만큼,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다른 여성들의 침묵도 함께 보인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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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 전기 문학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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