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3년 훈민정음이 창제됐다. 새 문자를 만들었으면 시험해봐야 한다. 세종은 그 시험 과제로 왕조의 창업을 노래하는 서사시를 택했다.
1442년부터 자료를 모아 1445년(세종 27) 4월, 권제·정인지·안지 등이 125장의 한글 가사와 그것을 옮긴 한시를 지어 바쳤다. 성삼문·박팽년·이개가 주석을 달고 정인지가 서문을, 최항이 발문을 썼다.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는 한문 부분을 덧붙여 1447년(세종 29) 총 10권 5책으로 간행됐다.
제목의 뜻은 "용이 날아올라 하늘을 다스린다"이다. 여기서 여섯 용은 목조 이안사, 익조 이행리, 도조 이춘, 환조 이자춘,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 — 세종의 직계 6대다.
海東(해동) 六龍(육룡)이 ᄂᆞᄅᆞ샤 일마다 天福(천복)이시니 / 古聖(고성)이 同符(동부)ᄒᆞ시니 (제1장)
불휘 기픈 남ᄀᆞᆫ ᄇᆞᄅᆞ매 아니 뮐ᄊᆡ 곶 됴코 여름 하ᄂᆞ니 / ᄉᆡ미 기픈 므른 ᄀᆞᄆᆞ래 아니 그츨ᄊᆡ 내히 이러 바ᄅᆞ래 가ᄂᆞ니 (제2장)
제2장이 특히 유명하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아 꽃 좋고 열매 많으며,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그치지 않아 내를 이루어 바다에 이른다. 순우리말로만 이루어진 이 한 장은 한글 문장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꼽힌다.
【무엇을 위한 노래인가】 목적은 분명하다. 조선 건국의 정당화다.
구성이 그것을 말해준다. 1~16장은 조선 건국의 유래가 오래됐음을, 이후 여러 장에서 조상들의 성덕을, 그리고 태조의 창업이 천명에 따른 것임을 노래한다. 90~109장은 태종의 용모와 인품, 하늘의 도움을 받은 일들을 다룬다.
논법은 일관된다. 우리 조상이 한 일이 중국 옛 성군이 한 일과 부합한다는 것이다. 곧 이성계의 즉위는 찬탈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었다는 주장이다. 위화도 회군을 다룬 67장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10~125장은 후대 왕들을 경계하는 내용이다. 마지막 125장에는 "경천근민(敬天勤民)",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에 부지런하라는 당부가 들어 있다. 즉 이 노래는 왕조를 찬양하면서 동시에 왕에게 조건을 건다. 하늘의 명으로 세워졌으니 하늘의 뜻을 저버리면 그 명도 거둬질 수 있다는 논리다.
찬양가이면서 경계서라는 이 이중성이 「용비어천가」의 성격이다. 유학자 관료들이 왕명으로 지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문학사에서의 자리】 이 작품은 여러 개의 "최초"를 가진다. 훈민정음으로 쓰인 최초의 문헌이고, 한글로 엮인 최초의 작품이자 책이며, 악장이라는 갈래의 독자적 형식을 개척한 첫 작품이다.
본문과 한시는 1445년, 곧 훈민정음이 반포되기 1년 전에 만들어졌다. 그래서 이 노래는 반포 이전에 지어진 유일한 한글 작품이기도 하다.
형식은 각 장 2행, 각 행 4구가 원칙이다. 다만 1장은 3구, 125장은 9구로 예외다. 앞뒤를 다르게 만들어 시작과 끝을 표시한 것이다.
판본 문제도 있다. 초간본은 활자본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전하지 않고, 현전하는 것은 모두 목판 중간본이다. 옛 판본에 125장이 123장으로 적혀 있어, 본디 123장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때 조선은】 세종대는 조선의 제도가 완성되던 시기다. 4군 6진 개척으로 국경이 확정됐고, 공법으로 조세 제도가 정비됐으며, 장영실의 과학기구가 만들어졌고, 갑인자가 주조됐다.
동시에 정통성 문제가 남아 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조선은 고려 신하가 고려 왕을 몰아내고 세운 나라다. 위화도 회군은 명령 불복종이었고, 정몽주 살해는 정변이었다. 개국 50년이 지났어도 이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용비어천가」는 그 빈틈을 메우려는 시도였다. 새로 만든 문자로, 여섯 대에 걸친 서사시로, 하늘의 뜻이라는 언어로. 오늘날 "용비어천가를 쓴다"는 말이 권력에 대한 과도한 찬양을 비꼬는 관용어가 된 것은 이 작품의 성격을 사람들이 정확히 읽어냈기 때문이다. 다만 125장의 경천근민까지 함께 읽으면, 이 노래가 단순한 아부만은 아니었다는 것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