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 — 당에서 이름을 얻고 신라에서 막히다

885 · 당 양주 / 신라 가야산

최치원(崔致遠, 857~908 이후)은 신라 말의 문신이자 문장가다.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 시호는 문창(文昌)이며 경주 최씨다.

열두 살에 당으로 유학을 떠났다. 아버지가 십 년 안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6년 만인 열여덟에 빈공과(賓貢科, 외국인 대상 과거)에 급제했다.

【토황소격문 — 그리고 그에 붙는 단서】 당에서 그의 이름을 알린 것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다.

880년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그는 절도사 고병(高騈)의 막하에서 격문을 지었다. 온 천하 사람이 너를 드러내놓고 죽이려 할 뿐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까지 너를 죽이려 이미 의논했을 것이라는 대목이 유명하다. 이 글을 읽던 황소가 놀라 침상에서 굴러떨어졌다는 일화가 전한다.

다만 이 일화에는 단서가 필요하다. 「토황소격문」은 중국의 『구당서』·『신당서』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소설 「최고운전」과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국통감』에만 나온다. 당의 기록에서 최치원은 고병의 문객(門客)으로만 남아 있다. 그가 받은 도통순관(都統巡官)이라는 직책도 토벌군 사기를 높이려 내린 명예직으로 실권은 없었다.

다만 『신당서』 예문지에 "치원 찬(致遠 撰)"으로 「사륙집」·「계원필경」이 소개돼 있어, 그의 문장가로서의 위상 자체는 당에서도 인정받았음이 확인된다.

【계원필경 — 남아 있는 것】 885년 귀국하면서 그는 당에서 쓴 글을 모아 헌강왕에게 바쳤다. 그것이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20권이다. 함께 바친 『중산복궤집』은 전하지 않는다.

『계원필경』은 우리나라에 남은 가장 오래된 개인 문집이다. 변려문(騈儷文)으로 쓴 공문서와 편지, 시가 실려 있다. 그 안에는 인삼 관련 기록인 「헌생일물장」, 베트남사 연구 자료가 되는 「보안남록이도기」처럼 문학 바깥에서도 중요한 자료가 섞여 있다.

『계원필경』 밖의 작품은 조선 초 『동문선』에 많이 실렸다. 「추야우중(秋夜雨中)」이 대표적이다 — 가을바람에 괴로이 읊나니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이 적구나, 창밖에는 밤 깊도록 비가 오는데 등불 앞의 마음은 만 리를 달린다. 이국에서 고향을 그리는 마음과 알아주는 이 없는 처지가 겹친다.

【돌아온 뒤 — 좌절】 귀국 후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육두품이었다. 진골이 아니면 오를 수 있는 관직에 한계가 있었다.

894년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올려 개혁을 건의했고 아찬 벼슬을 받았으나, 실제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골품제가 흔들리고 지방에서 호족이 일어나던 시기였지만, 중앙은 개혁을 감당할 힘이 없었다.

결국 그는 관직을 버리고 각지를 떠돌다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했다. 이후 행적과 죽은 때는 알려지지 않았다.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부산 동백섬 일대의 경관에 반해 자기 호 해운(海雲)을 따 지명을 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하며, 해운대라는 지명의 유래가 됐다. 그가 새겼다는 "海雲臺" 석각이 남아 있다.

【남긴 것】 최치원은 한국 한문학의 시조로 꼽힌다.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의 한 사람이고, 고려 현종 때 내사령에 추증되고 문창후 시호를 받았다.

문학사적 의미와 별개로 그의 글은 사료로도 중요하다.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 화랑도의 성격을 설명한 거의 유일한 당대 기록이다. 유·불·도 삼교를 포함하는 풍류(風流)라는 도가 우리나라에 있다는 그의 서술은, 앞서 향가 시리즈에서 본 풍월도 논의의 근거가 된다.

한 가지 덧붙이면, 일부 재야에서 『천부경』 전승에 최치원이 관여했다고 주장한다. 다만 이는 학계에서 인정되지 않는다.

【그때 신라는】 최치원이 살았던 9세기 후반은 신라가 무너져가던 때다. 진성여왕대(887~897)에 조세가 걷히지 않고 원종·애노의 난(889)이 일어났으며, 견훤과 궁예가 일어나 후삼국이 시작된다.

그가 당에서 익힌 것은 중앙집권 관료제의 문법이었다. 능력으로 관리를 뽑고 제도로 나라를 운영하는 방식이다. 신라의 골품제는 그 반대였다.

시무십여조가 시행되지 못한 것은 개인의 불운이라기보다 체제의 한계였다. 그의 아들은 경순왕과 함께 고려에 귀의했고, 손자 최승로는 고려 성종에게 시무28조를 올려 이번에는 채택된다. 할아버지가 못 한 일을 손자가 다른 나라에서 해낸 셈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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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문학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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