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고려 중기의 문신이자 문장가다.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이며, 술과 시와 거문고를 좋아한다 하여 삼혹호(三酷好) 선생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어려서부터 시문에 뛰어났으나 과거에는 여러 번 낙방했다. 벼슬에 임명될 때마다 즉흥시를 짓기로 유명했고,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그의 글 대부분이 실려 있다.
【동명왕편 — 우리 신화를 서사시로】 그의 대표작은 「동명왕편(東明王篇)」이다. 고구려 시조 주몽의 건국 신화를 오언 장편 한시로 쓴 영웅서사시다.
이 작품이 갖는 의미는 소재에 있다. 당시 한문학의 소재는 대개 중국 고사였다. 중국의 성군과 영웅을 인용해 글을 짓는 것이 격식이었다. 그런데 이규보는 우리 시조의 이야기를 서사시로 삼았다.
서문에서 그는 창작 동기를 밝힌다. 처음에는 동명왕 이야기를 황당하다 여겼으나 거듭 읽으니 그것이 환(幻)이 아니라 성(聖)이며 귀(鬼)가 아니라 신(神)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즉 우리 신화도 중국 신화와 마찬가지로 신성한 것이라는 선언이다.
사료적 가치도 크다. 그는 「동명왕편」을 쓰면서 지금은 전하지 않는 『구삼국사(舊三國史)』를 인용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삼국사기』 동명성왕본기와 다른 계통의 전승을 비교할 수 있다.
【신라를 평가하다】 이규보는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신라에 대해서는 박인범·설총·최치원 같은 인재를 배출해 천 년 문명국가를 이뤘다고 높이 평가했다.
특히 최치원을 높이 샀다. 최치원이 『당서』 열전에 실리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글을 『동국이상국집』에 남겼다. 한문학의 두 정점이 250년의 간격을 두고 이어지는 장면이다.
그 밖에 「국선생전(麴先生傳)」 같은 가전체(假傳體) 작품도 남겼다. 술을 의인화해 전기(傳記) 형식으로 쓴 것으로, 사물을 사람처럼 그리는 이 방식은 고려 한문학의 한 갈래를 이룬다.
【무신정권과의 관계 — 논쟁】 이규보를 읽을 때 피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최씨 무신정권과의 관계다.
그는 최충헌·최이 부자에게 발탁돼 요직을 지냈다. 무신정권을 찬양하는 글도 남겼다. 그래서 권력에 지나치게 밀착했다는 비판이 오래 따라붙는다.
변호하는 견해도 있다. 무신란으로 문신이 대거 살해된 뒤 살아남은 지식인에게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은둔하거나 협력하거나 둘 중 하나였고, 그는 후자를 택해 자기 재능을 펼 자리를 얻었다는 설명이다. 또 그의 글에는 농민의 고통을 다룬 작품도 있어, 권력에 붙은 문인으로만 규정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어느 쪽이든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다만 「동명왕편」의 민족적 자부심과 무신정권 찬양이 한 사람 안에 있었다는 사실은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인로와 이제현】 고려 한문학에는 다른 이름들도 있다.
이인로(1152~1220)는 『파한집(破閑集)』을 남겼다. 시화(詩話), 곧 시에 얽힌 이야기와 비평을 모은 책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시화집으로 꼽힌다. 앞서 「한림별곡」 1장에 그의 이름이 나온 바로 그 인물이다.
이제현(1287~1367)은 원 간섭기의 문인이다. 원의 수도에서 활동하며 국제적 견문을 넓혔고, 『역옹패설』을 남겼다. 앞서 고려가요 시리즈에서 본 「서경별곡」 2연을 한시로 옮긴 것도 그다. 우리말 노래를 한시로 번역해 남긴 그의 작업 덕분에 지금은 사라진 고려 노래의 내용을 일부나마 짐작할 수 있다.
【그때 고려는】 이규보가 산 시기는 고려사에서 가장 격동적인 때다. 1170년 무신란으로 그가 두 살 때 세상이 뒤집혔고, 최충헌이 집권해(1196) 최씨 정권이 시작됐다.
1231년부터 몽골이 침입했고 이듬해 강화 천도가 있었다. 그는 강화에서 만년을 보냈다. 팔만대장경 조판이 시작된 것도 이 무렵이다.
앞서 고려가요 시리즈에서 본 「청산별곡」의 배경으로 자주 지목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같은 시대에 누군가는 청산에 살겠다는 노래를 우리말로 불렀고, 누군가는 한문으로 서사시를 썼다. 두 갈래의 문학이 나란히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