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사는 대단히 초라하게 시작한다.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작품이라고 해봐야 네 줄짜리 노래 몇 편이 전부다. 「공무도하가」, 「황조가」, 「구지가」 — 이 셋을 묶어 상고시가(上古詩歌)라고 부른다. 여기에 백제의 「정읍사」를 더하면 삼국시대까지 남은 노래가 얼추 갖춰진다. 네 편. 그것이 우리가 가진 전부다.
이 빈곤을 먼저 직시할 필요가 있다. 같은 시기 중국에는 『시경』 305편이 있었고 그리스에는 두 편의 대서사시가 있었다. 우리에게 없는 이유는 노래가 없어서가 아니라 문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글 창제는 15세기다. 그전까지 우리말 노래를 적을 방법은 한문으로 번역하거나,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표기하는 향찰(鄕札) 같은 방식뿐이었다. 그래서 고대의 노래는 두 번의 관문을 통과해야만 살아남았다 — 누군가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야 했고, 그것을 적을 문자 수단이 있어야 했다. 대부분의 노래는 그 관문 앞에서 사라졌다.
【네 편의 공통점, 그리고 결정적 예외】 살아남은 넷에는 공통점이 있다.
첫째, 원본이 없다. 상고시가 세 편은 모두 한자로 번역된 4구(네 줄) 형태로만 전한다.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어떤 말로, 어떤 가락으로 불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읽는 것은 원문이 아니라 번역문이다.
둘째, 노래만 따로 전하지 않고 반드시 이야기와 함께 전한다. "이런 일이 있었고, 그래서 이 노래를 불렀다"는 배경설화가 붙어 있다. 그래서 이 노래들은 네 줄만 봐서는 안 되고 그 앞의 사연까지 읽어야 한다. 오히려 해석 논쟁의 대부분은 노래 자체가 아니라 배경설화를 어떻게 읽느냐에서 갈린다.
셋째, 기록 시점이 창작 시점보다 한참 뒤다. 「공무도하가」는 후한 말 중국 문헌에, 「황조가」는 12세기 『삼국사기』에, 「구지가」는 13세기 『삼국유사』에, 「정읍사」는 15세기 『악학궤범』에 처음 실린다. 짧게는 수백 년, 길게는 천 년 넘게 구전되다 뒤늦게 정착한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정읍사」에는 결정적인 예외가 있다. 이 노래만은 한문 번역이 아니라 우리 글자로 기록됐다. 백제 노래가 천 년 가까이 구전되다 조선 성종 때 훈민정음으로 적힌 것이다. 그래서 「정읍사」는 한글로 표기된 가장 오래된 노래이자, 옛사람이 실제로 발음한 소리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고대가요다. 다만 그 대가로 어석(語釋) 논쟁이 가장 치열한 작품이 되기도 했다 — 읽을 수는 있는데 무슨 뜻인지를 두고 학자마다 견해가 갈린다.
【세 번째 특징이 낳는 근본 물음】 오래 구전되는 동안 노래가 바뀌지 않았을까? 나중에 기록한 사람이 자기 시대의 감각으로 고쳐 쓴 건 아닐까? 이 물음은 네 작품 모두에 걸리며, 각기 다른 형태의 논쟁을 낳았다.
「공무도하가」는 "이게 우리 노래인가"가 쟁점이다. 중국 문헌에 먼저 실렸고 배경이 중국 땅일 수 있기 때문이다. 「황조가」는 "유리왕이 지었는가"가 쟁점이다. 떠돌던 민요가 후대에 왕의 설화에 삽입됐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구지가」는 "이 노래가 원래 무엇이었는가"가 쟁점이다. 왕을 맞는 노래인지, 풍요를 비는 노래인지, 성적 주술인지 견해가 열 갈래 가까이 갈린다. 「정읍사」는 "백제 노래인가"와 "무슨 뜻인가"가 동시에 쟁점이다.
그래서 이 시리즈는 "이것이 최초의 서정시다"라고 단정하는 대신, 각 작품마다 어떤 견해들이 왜 대립하는지를 함께 보여주려 한다. 확정된 것과 해석된 것을 구분하는 것 — 자료가 이토록 적은 시대를 다룰 때 그것 말고 정직한 방법은 없다.
【그럼에도 왜 첫 자리인가】 이 짧은 노래들이 문학사의 첫 페이지를 차지하는 이유가 있다. 여기에는 이후 천 년간 한국 시가가 반복할 감정과 형식의 원형이 이미 들어 있다.
「공무도하가」의 이별과 죽음은 고려속요 「가시리」, 정지상의 「송인」을 거쳐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초혼」까지 이어지는 "이별의 정한(情恨)" 계보의 출발점으로 읽힌다. 「구지가」의 집단적 주술은 700년 뒤 「해가(海歌)」로 되살아나고 신라 향가의 주술성으로 흘러간다. 「황조가」는 집단의 노래에서 개인의 노래로 넘어가는 길목에 서 있다. 「정읍사」는 후렴을 떼면 3연 6구가 되어 시조 3장 6구 형식의 근원으로 지목된다.
말하자면 이 네 편은 작품이자 동시에 씨앗이다. 하나는 정서의 씨앗, 하나는 주술의 씨앗, 하나는 서정의 씨앗, 하나는 형식의 씨앗이다.
【이 시리즈의 지도】 네 작품은 각각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 속한다. 「공무도하가」는 고조선의 어느 나루터(선사시대 지도), 「황조가」는 기원전 17년 고구려 유리왕의 왕궁 근처(고대 지도), 「구지가」는 서기 42년 김해 구지봉(고대 지도), 「정읍사」는 백제 정촌현의 망부석(고대 지도)이다.
문학사를 연표가 아니라 지도 위에서 읽으면, 이 노래들이 각각 어떤 사회에서 태어났는지가 함께 보인다 — 중국과 교역하며 나루터에 병졸을 두던 고조선, 여러 부족과 이주민을 통합해 가던 초기 고구려, 아홉 촌장이 모여 왕을 추대하던 가야, 그리고 행상이 마을을 오가며 장사하던 백제. 노래는 진공에서 태어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