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주』가 전하는 사건은 이렇다. 조선의 나루터 병졸(진졸, 津卒) 곽리자고가 새벽에 일어나 배를 저어 가는데, 머리가 흰 미친 사람(백수광부, 白首狂夫)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호리병을 든 채 어지러이 물을 건너고 있었다. 아내가 뒤쫓아 외치며 막았으나 다다르기 전에 그는 물에 빠져 죽었다. 아내는 공후(箜篌, 하프처럼 줄을 뜯는 옛 악기)를 타며 「공무도하」의 노래를 지었는데 소리가 심히 구슬펐고, 노래가 끝나자 스스로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자고가 돌아와 아내 여옥(麗玉)에게 그 광경과 노래를 전하니, 여옥이 슬퍼하며 공후로 그 소리를 본받아 탔고 듣는 자마다 눈물을 흘렸다. 여옥은 그 소리를 이웃 여자 여용(麗容)에게 전했다 — 이것을 일컬어 「공후인(箜篌引)」이라 한다.
公無渡河 —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公竟渡河 — 임은 결국 물을 건너시네 墮河而死 — 물에 빠져 죽었으니 當奈公何 — 장차 임을 어이할꼬
【1. 텍스트 자체가 하나가 아니다】 우리는 흔히 이 네 줄을 확정된 원문처럼 다루지만, 이본(異本)에 따라 글자가 다르다. 2구의 竟(경, 결국)이 終(종, 끝내)으로 된 것이 있고, 3구의 墮河(타하, 물에 빠져)가 公墮(공타, 임이 빠져) 또는 公淹(공엄, 임이 잠겨)으로 된 것이 있으며, 4구의 當(당)이 將(장)으로 된 것도 있다. 큰 차이는 아니지만, 이것이 오랜 세월 여러 손을 거쳐 옮겨 적힌 텍스트임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애초에 이 노래는 우리말로 불렸을 것이고 지금 남은 것은 한문 번역이니, 우리가 읽는 것은 번역의 이본들인 셈이다. 원래 어떤 말과 가락이었는지는 복원할 방법이 없다.
【2. 출전의 계보 — 이 노래는 중국 문헌에서 왔다】 이 작품을 처음 수록한 책은 후한 말 채옹(蔡邕)의 『금조(琴操)』다. 널리 알려진 것은 진(晉)나라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이고, 이후 조선 문인들이 『해동역사』·『대동시선』·『청구시초』, 심지어 박지원의 『열하일기』에까지 옮겨 적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순서다. 중국 기록이 먼저이고 우리 기록이 나중이다. 한치윤이 『해동역사』에 이를 실은 것은 19세기이니, 이 노래가 한국문학사에 정식 편입된 것은 불과 200년 남짓이다. 우리 문학의 첫 페이지가 남의 책에서 역수입됐다는 사실 자체가 고대사 기록의 빈곤을 말해준다.
【3. 그래서 이게 우리 노래인가 — 국적 논쟁】 채록자도 중국인, 채록 양식도 중국 악부(樂府), 창작 지역도 중국이라는 점에서 이것을 중국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일찍부터 제기됐다. 배경설화의 "조선(朝鮮)"을 고조선이 아니라 중국 직례성(直隷省)의 조선현(朝鮮縣)이라는 행정구역으로 읽는 것이다. 곽리자고라는 이름도 "곽 마을에 사는 사공"이라는 보통명사로 풀 수 있다는 지적이 따라붙는다.
이에 대한 반론의 핵심은 그 조선현이 어떤 곳이었느냐다. 그 지역은 고조선 이래로 한인(韓人)들이 잔류하며 독자적 문화 양식을 유지하던 곳이었다. 따라서 지역이 중국 행정구역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 원작자가 중국인이라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중국 쪽에 이런 노래가 전해지고 기록됐다는 사실 자체를 "우리 노래가 그만큼 널리 퍼져 있었다"는 증거로 읽는 것이 지배적 견해다. 곽리씨가 고구려 씨족의 하나로 소개된다는 점도 근거로 제시된다. 참고로 사료에 따라 藿里子高와 霍里子高로 표기가 갈린다.
【4. 백수광부는 누구인가 — 가장 뜨거운 쟁점】 이 사람의 정체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작품 전체가 달라진다. 주요 견해들은 이렇다.
① 무당(巫)설 —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해석이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술병을 들고, 강물에 뛰어드는 행위는 미치광이의 기행이 아니라 물의 신을 부르는 무당의 굿 절차로 읽힌다. 강에 들어가는 것은 신과 만나는 통과의례이며, 그가 익사했다는 것은 곧 그 주술이 실패했다는 뜻이 된다. 아내가 공후를 뜯은 것도 개인적 애도가 아니라 무당의 반주 행위로 볼 수 있다.
② 신화적 원형설 — 정병욱은 백수광부를 그리스 신화의 주신(酒神) 바카스에, 그의 아내를 주신을 따라다니는 악신(樂神) 님프에 견주었다. 술과 음악과 광기와 물이라는 요소의 결합이 여러 문명의 신화에 반복되는 원형이라는 지적이다.
③ 타락한 신설 — 박용숙은 머리가 희다는 점에 주목해 그를 타락했거나 죄지은 신으로 읽었다. 나아가 신정(神政)시대에 공후는 일반인의 악기가 아니라 신물(神物)이었고, 조선진(朝鮮津) 역시 일반인이 갈 수 없던 신역(神域) 주변의 나루터였다고 본다.
④ 정렬(貞烈)의 여심설 — 장덕순은 초점을 아내에게 옮긴다. 마지막 구 當奈公何에서 남편을 따라 죽겠다는 여인의 의지를 읽어내고, 이 노래를 열녀의 노래로 규정했다.
⑤ 역사적 인물설 — 고조선 멸망기의 혼란 속에서 무너진 지배층, 곧 패망한 나라의 장군이나 왕족의 최후로 읽는 해석도 있다. 술에 취해 강으로 걸어 들어가는 백발의 남자를, 돌아갈 나라를 잃은 자의 자기 파괴로 보는 것이다. 이 독법은 노래를 개인의 비극에서 한 문명의 종말에 대한 애가로 확장시킨다. 다만 사료가 이 인물의 신분을 전혀 밝히지 않으므로, 이는 문헌으로 입증된 사실이 아니라 시대 배경에 기댄 해석임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배경설화의 어떤 구절도 그를 장군이나 왕족으로 지시하지 않는다.
【5. 설화는 두 겹이다】 학계는 이 배경설화가 처음부터 지금 형태는 아니었다고 본다. 초기 형태는 백수광부와 그의 처를 주인공으로 한 단순설화, 즉 "어떤 남자가 강에 빠져 죽고 아내가 노래하고 따라 죽었다"까지였을 것이다. 여기에 후대에 곽리자고와 여옥이 개입하면서 복합설화로 변화했고, 결국 「공후인」이라는 악곡의 유래를 설명하는 설명설화가 됐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등장인물의 구조가 선명해진다. 노래를 처음 부른 사람(백수광부의 아내) → 목격자(곽리자고) → 재현한 사람(여옥) → 전수받은 사람(여용). 작자를 여옥으로 적은 기록이 많지만, 실제 창작자는 이름조차 남지 않은 백수광부의 아내다. 여옥은 그것을 악곡으로 정착시킨 사람이다. 한국문학사의 첫 작품에서 창작자의 이름이 지워지고 재현자의 이름만 남았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곱씹을 만하다.
【6. 왜 이 노래가 서정시의 출발점인가】 김학성의 분석이 이 작품 해석의 한 축을 이룬다. 그에 따르면 백수광부의 죽음에는 경험과 초경험이 이어져 있다고 믿는 주술적·신화적 세계관이 투영돼 있다. 그는 강을 건널 수 있다고 믿었기에 뛰어들었다. 반면 아내의 죽음에는 경험적 현실이 세계 이해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불연속성에 기초한 현실적·역사적 세계관이 반영돼 있다. 그녀는 강이 건널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만류했다.
그래서 이 노래는 두 세계관이 충돌하는 전환기의 사유를 담는다. 작품에서 "현실적인 것"은 남편의 익사이고 "이상적인 것"은 그가 빠져 죽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인데, 화자는 처음부터 후자를 포기한 상태에서 노래한다. 1구의 만류는 이미 실패를 예감한 만류다. 이길 수 없음을 알면서 저항하는 것 — 여기서 비극미가 발생한다. 김학성은 이를 신화적 숭고 내지 주술적 숭고의 파탄으로 초래된 비극미라 규정했다.
이 관점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한국 서정시의 발생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세계와 내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믿음(동일성)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집단의 주술 노래로 충분하다. 그 믿음이 깨지고 세계가 나와 분리된 것으로 감각될 때, 비로소 개인의 목소리로 세계를 향해 탄식하는 서정시가 출현한다. 「공무도하가」는 신화적 질서와 주술적 힘이 흔들리기 시작한 신화시대 말기의 산물이며, 신의 신성성이 의심되고 주술이 실패할 때 무엇이 오는지를 보여준다.
【7. 물의 세 얼굴】 짧은 네 줄에서 강은 세 번 등장하며 매번 다른 것이 된다. 1구의 물은 건너지 말아야 할 금기이자 경계다. 3구의 물은 죽음 그 자체다. 그리고 배경설화에서 아내가 몸을 던지는 마지막 물은 남편에게 가닿는 통로가 된다. 막아야 할 것 → 앗아간 것 → 따라가는 길. 같은 강이 금기에서 죽음으로, 죽음에서 재회의 매개로 바뀐다. 물을 매개로 사랑과 죽음이 결합하는 이 구조를, 정병욱은 사랑과 죽음을 맞바꿀 수 있다는 강렬한 애정의 표현으로 읽었다.
【8. 그때 조선은】 배경설화가 그리는 사회의 얼개도 읽어둘 만하다. 나루터에 병졸이 배치돼 있었다는 것은 강을 건너는 사람과 물자를 관리하는 국가 조직이 있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 시기 조선은 중국과 모피·가죽을 매개로 원거리 교역을 하던 사회였고(『관자』 기록), 위만조선기에는 한나라와 남쪽 진국(辰國) 사이의 중계무역을 독점하며 성장했다. 기원전 108년 왕검성이 함락되며 이 질서는 무너진다.
그 무너짐이 이 노래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웠는지는 확정할 수 없다. 앞서 본 ⑤의 해석이 매력적인 것은 시대의 공기와 노래의 정서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지만, 사료는 침묵한다. 다만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 주술이 세계를 설명하던 시대가 저물고 개인이 자기 목소리로 상실을 노래하기 시작한 그 전환기가, 공교롭게도 고조선이라는 첫 나라가 저물던 시기와 겹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