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40년간 형태를 바꿔온 협력의 구조가 하루아침에 근거를 잃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은 해방 한 달 전에 이미 해산돼 있었고, 임전보국단과 문인보국회는 소멸했다. 그러나 단체의 소멸이 책임의 정리를 뜻하지는 않았다.
1948년 제헌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만들고 이듬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출범시켰다. 이광수와 최남선이 체포됐고, 박춘금 같은 재일 친일파의 송환도 시도됐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1949년 경찰의 습격과 정치적 압박 속에 사실상 와해됐고, 기소된 이들 대부분이 처벌 없이 풀려났다. 협력의 40년에 대한 사법적 정리는 미완으로 끝났다 — 이 미완이 이후 한국 현대사의 오랜 논쟁이 된다.
반세기 뒤, 정리는 다른 형태로 다시 시도됐다. 2005년 출범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2009년까지 1,005명의 친일반민족행위를 국가 차원에서 결정했고, 같은 해 민족문제연구소는 4,776명을 수록한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했다. 처벌의 시효는 지났지만 기록의 시효는 없다는 것 — 두 작업의 공통된 전제였다. 이 시리즈가 모든 서술의 근거로 삼은 것도 바로 이 기록들이다.
협력의 계보를 따라온 이 시리즈는 여기서 멈추지만, 그 이름들은 아틀라스에 남아 있다. 위원회가 결정한 1,005명 전원을 「결정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 귀족·중추원부터 문화·해외까지 여덟 분야로 나뉘어 있고, 이름마다 국가가 밝힌 결정 이유 원문이 그대로 붙어 있다. 이 시리즈가 다룬 열여섯 단체와도 이어져 있어서, 계보도에서 단체 하나를 누르면 그 단체가 결정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함께 뜬다. 독립운동가 1만 8천여 명을 지역별로 펼친 「이름의 지도」와 마주보는 자리다.
기억은 양쪽을 다 적어야 완성된다 — 목숨을 건 이름들과, 협력한 이름들을. 그런데 두 명단의 크기가 다르다. 포상받은 독립유공자는 1만 8천여 명이고, 국가가 결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는 1,005명이다. 이 차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 협력한 사람이 그만큼 적었다는 뜻일까, 아니면 조사와 기록이 거기까지밖에 미치지 못했다는 뜻일까? 처벌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역사에서, 기록은 처벌을 대신할 수 있을까 — 아니면 기록이야말로 처벌보다 오래가는 책임의 형식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