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10월 29일, 경성 부민관에 문인 250여 명이 모여 조선문인협회를 결성했다. 총독부 학무국의 알선과 조종 아래 만들어진 어용 단체였다. 발기인은 이광수·김동환·김억·정인섭·유진오·이태준 등이었고, 회장은 이광수. 결성 성명서는 이렇게 선언한다 — "조선문인협회를 결성하고 흥아(興亞)의 대업을 완성시킬 황군적(皇軍的) 신문화 창조를 위하야 용왕매진코저 맹세하는 바입니다." 풀어 말하면, 붓을 든 사람들이 병사처럼 전쟁에 복무하겠다는 맹세다. 협회는 전선 병사에게 위문문과 위문대를 보내고, 순회 시국강연을 돌고, 부여신궁 조영 공사에 근로봉사를 나갔다.
회장 이광수의 궤적은 이 시기의 상징이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수감됐다가 1938년 전향을 선언하고 풀려난 그는, 협회 회장을 맡은 이듬해 「창씨와 나」를 발표하며 자신의 창씨명 "향산광랑(香山光郞)"을 공개하고 창씨개명을 지지했다. 1942년에는 징병제 연설회에서 이를 "획기적 대선물"이라 불렀다. 2·8독립선언과 임시정부 기관지의 붓이, 20여 년 뒤 정확히 반대 방향을 쓰고 있었다.
1943년 4월 17일, 조선문인협회는 조선하이쿠작가협회·조선센류협회·국민시가연맹과 통합해 조선문인보국회로 확대된다. "조선에 최고의 황도문학(皇道文學)을 수립한다"는 구호 아래 문학자 1천여 명이 결성식에 모였다 — 250명의 협회가 4년 만에 1천 명의 보국회가 된 것이다. 이광수와 최남선은 일본 유학생들에게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로 도쿄까지 건너갔다. 3·1독립선언서를 기초했던 최남선이,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군 입대를 권한 것이다.
다만 이 명단을 읽을 때도 결이 필요하다. 발기인에 이름이 오른 것과 회장으로 앞장선 것, 강요 속에 한 편을 쓴 것과 수십 편의 논설로 독려한 것은 같지 않다 — 친일인명사전이 행위의 양과 질을 따져 수록 기준을 세운 이유다. 글은 총과 달리 쓴 사람의 이름이 남는다. 그래서 문학의 친일은 가장 오래, 가장 구체적으로 기록됐다 — 이름이 남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쓰게 만든 힘은 무엇이었고, 같은 압력 앞에서 끝내 붓을 꺾거나 침묵을 택한 이들과의 차이는 어디서 갈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