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 사건 — 학살은 있었으나, 가해자는 논쟁 중

1950 10월 13일 · 황해도 신천군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하자, 북한 당국은 후퇴하며 지주·기독교인 등 "반혁명분자"로 분류된 주민들을 예비검속해 처형했다. 이에 맞서 지역 우익 인사들이 봉기해 치안대를 조직했고, 유엔군의 짧은 점령 기간(약 52일) 동안 우익 치안대와 잔류 좌익 세력 사이에 유혈 보복이 반복되며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됐다. 그런데 북한은 이 학살의 책임을 전적으로 미군에게 돌려 "희생자 3만 5천 명"이라 발표하고, 김일성의 직접 지시로 1958년 신천군 학살 현장에 신천박물관을 세워 반미 교육의 장으로 활용해 왔다. 국제민주법률가협회(공산권 성향 단체)의 조사 외에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독립적 증거가 없으며, 국내외 학계는 이를 좌우 주민 간의 내전적 유혈 충돌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실제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 책임을 자신이 만든 체제 안에서 어떻게 서사화했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 신천은 그 둘이 뒤섞인 자리다.

이 사건은 김일성 — 항일유격대 대장에서 "수령"으로 루트의 한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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