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연이 죽은 것이 1289년이다. 그리고 그의 비석에는 『삼국유사』가 적히지 않았다.
이 책이 어떻게 700년을 건너왔는지, 그 과정을 따라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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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판은 없다**
일연이 직접 간행한 판본은 전하지 않는다. 언제 처음 새겨졌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조선 초기에 한 번 간행됐을 것으로 본다. 근거는 이렇다. 1394년 경주에서 김거두(金居斗)가 낡은 『삼국사기』를 다시 간행했다는 기록이 있고, 뒤에 나오는 이계복의 발문에서 두 책이 함께 언급되기 때문이다.
이 조선 초기 간행본의 일부가 지금도 남아 있다. 부산 범어사에 있는 권4~5 한 책이 그것이다. 1907년 오성월(吳惺月)이라는 승려가 입수해 범어사에 기증했다고 첫 장에 적혀 있다.
이 범어사본에는 고려 왕들의 이름자를 피하는 피휘가 거의 적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 초기 간행본으로 판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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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2년, 경주**
이 책의 운명이 갈린 해다.
경주부윤 이계복(李繼福)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다시 새겨 간행했다. 중종 7년, 명나라 연호로 정덕(正德) 7년이다. 그래서 이 판본을 중종임신본 또는 정덕본이라 부른다.
이계복이 『삼국사기』 권말에 쓴 발문이 남아 있다. 거기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나라의 삼국본사(三國本史)와 유사(遺事) 두 책은 다른 곳에서는 간행된 것이 없고 오직 본부(경주)에만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 판이 깎이고 이지러져 한 줄에 겨우 네다섯 글자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이 문장을 다시 읽어보자.
1512년 시점에 이 책은 조선 전체에서 경주 한 곳에만 있었다. 그리고 그 판목은 닳아서 한 줄에 네다섯 글자밖에 읽을 수 없었다.
이계복이 이때 손을 쓰지 않았다면, 『삼국유사』는 사라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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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이 책을 어떻게 여겼나**
왜 한 곳에만 있었고, 왜 판목이 그 지경이 되도록 방치됐는가.
조선은 유교 국가였다. 『삼국유사』는 승려가 쓴 책이고, 불교 이야기로 가득하며, 곰이 사람이 되고 용이 나타나고 주술로 함대를 침몰시킨다.
사대부들이 읽고 인용할 만한 책이 아니었다. 『삼국사기』는 정사로 대접받았지만, 『삼국유사』는 그 그늘에 있었다.
다만 완전히 잊힌 것은 아니다. 1452년 이선제(李先齊)가 올린 상소문에 『삼국유사』를 읽고 언급한 대목이 있다. 조선 초기 관료가 이 책을 읽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러나 널리 읽히지는 않았다. 그래서 판목이 닳도록 새로 새겨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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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책들**
1512년 판본에서 찍어낸 책 몇 종이 지금 전한다.
**규장각본** — 낙장이 없는 유일한 완질본이다. 같은 판본 중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에 찍은 것으로 평가된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있다.
**고려대본** — 최남선이 소장하다가 고려대학교에 기증한 것이다. 초기 인출본이고 가필과 가획이 없어 원형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덕본 중 유일하게 구결로 현토가 되어 있어 읽기에 도움이 된다.
**일본 천리대학본** — 천리대학 도서관에 완질본이 있다.
2003년, 조선 초기 간행본과 중종임신본이 각각 국보 제306호와 제306-2호로 지정됐다.
2022년에는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기록유산위원회(MOWCAP)에서 아시아·태평양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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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에 다시 읽히다**
『삼국유사』가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갖게 된 것은 20세기 들어서다.
나라를 잃은 시기, 단군은 민족의 시조로 다시 불려 나왔다. 대종교가 단군 신앙을 내세웠고, 역사학자들이 고조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근거가 되는 최초의 문헌이 『삼국유사』였다.
최남선이 이 책을 소장하고 연구한 것도 그 흐름 안에 있다. (다만 최남선 자신은 뒷날 친일 행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된 인물이다.)
국어학자들은 향가 열네 수에 주목했다. 1929년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가 향가 해독을 시도했고, 1942년 양주동이 『조선고가연구』를 펴내 본격적인 해독의 길을 열었다.
미술사와 고고학에서도 이 책은 필수 자료가 됐다. 사라진 절과 탑의 위치, 불상의 유래, 왕릉의 자리를 알려주는 기록이 여기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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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설에 대하여**
한 가지 짚어둘 것이 있다.
『삼국유사』가 일제강점기에 조작됐다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된다. 특히 환인(桓因)이 원래 환국(桓國)이었는데 일제가 고쳤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이 주장은 근거가 없다.
첫째, 1512년 정덕본에서 국(國) 자는 모두 정자로 쓰여 있다. 그 부분만 약자를 썼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둘째, 1452년 이선제의 상소문에도 환인(桓因)으로 적혀 있다. 일제강점기보다 460년 앞선 기록이다.
셋째, 원문에서 환인이라는 이름 아래에는 「제석을 이른다(謂帝釋也)」는 세주가 달려 있다. 제석천은 불교의 신이니, 환인이라는 표기가 이 세주와 맞물린다.
앞서 4부에서 다룬 환단고기 논쟁과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판본과 사료를 실제로 확인하면 확인할 수 있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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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결정**
1512년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경주부윤 이계복은 낡은 판목을 보고 이 책들을 다시 새기기로 결정했다. 관찰사에게 아뢰고, 여러 고을에 나누어 판각하게 해서 완성했다.
그가 남긴 발문에는 이런 취지의 말이 있다. 우리나라의 옛일을 기록한 책이 없어질 지경이니 안타깝다는 것, 그래서 다시 간행한다는 것.
한 지방관의 판단이 없었다면 우리는 단군 기록도, 향가 열네 수도, 가락국기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책은 저절로 전해지지 않는다. 누군가 그것을 읽고, 가치를 알아보고, 다시 새겨야 한다.
일연이 사라져 가는 이야기를 주웠고, 이계복이 사라져 가는 책을 주웠다.
700년 사이에 그런 손이 몇 번 더 있었을 것이다. 대부분은 이름이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