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 — 아내를 빼앗기고 춤을 춘 남자

879 · 울산 개운포 · 경주

삼국유사 기이편에 「처용랑 망해사(處容郎 望海寺)」라는 조목이 있다. 신라 49대 헌강왕 때의 일이다.

──

**개운포에서**

헌강왕이 개운포(지금의 울산)에 놀러 갔다가 물가에서 쉬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길을 잃었다.

왕이 괴이히 여겨 물으니 일관이 아뢰었다. 이는 동해 용의 조화이니 좋은 일을 해주어 풀어야 합니다.

왕이 관리에게 명해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세우게 했다. 명령이 내려지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개운포(開雲浦) — 구름이 걷힌 포구라 했다.

동해 용이 기뻐하며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며 춤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중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왔다. 이름을 처용(處容)이라 했다.

왕은 처용에게 미녀를 아내로 주고 벼슬을 내려 머물게 했다.

──

**그날 밤**

처용의 아내가 매우 아름다웠다.

역신(疫神) — 전염병의 신이 그를 흠모해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 밤에 그 집에 들어가 몰래 함께 잤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자리에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물러났다.

──

그 노래가 「처용가」다.

서라벌 밝은 달에 / 밤들이 노니다가 / 들어와 자리를 보니 / 다리가 넷이어라

둘은 내 것이었고 / 둘은 누구 것인가 / 본디 내 것이다마는 /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

**역신이 무릎을 꿇다**

역신이 형체를 드러내 처용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제가 공의 아내를 흠모해 지금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런데 공이 노하지 않으시니 감격하여 아름답게 여깁니다. 맹세컨대 이후로는 공의 얼굴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 일로 나라 사람들이 처용의 얼굴을 그려 문에 붙여 나쁜 것을 물리치고 경사를 맞았다.

왕은 영취산 동쪽 기슭에 절을 세우고 망해사(望海寺)라 했다. 신방사(新房寺)라고도 불렀다. 용을 위해 세운 절이다.

──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읽을까**

이 짧은 이야기만큼 해석이 갈린 기록도 드물다. 주요한 견해들을 정리해 보자.

**무속으로 읽기.** 처용이 무당이고 이 노래는 굿에서 부르던 무가라는 견해다. 역신을 쫓는 의식의 일부이며, 처용의 춤은 굿춤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처용가무는 고려와 조선의 나례(섣달그믐에 악귀를 쫓는 의식)에서 공연됐다.

**불교로 읽기.** 처용을 용왕의 아들, 곧 호법룡으로 보고 이 노래를 일종의 진언으로 읽는 견해다.

**주술로 읽기.** 「구지가」에서 「해가」로 이어지는 주술 노래의 계보 위에 있다는 견해다. 노래로 대상을 제압하는 구조가 같다는 것이다.

**민요로 읽기.** 강자에게 아내를 빼앗긴 약자의 비애를 웃음으로 표현한 민요라는 견해다.

**역사로 읽기.** 처용을 아랍이나 페르시아 계통의 이방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울산은 국제 무역항이었고, 신라 하대에는 서역과의 교류 흔적이 나타난다. 처용 가면의 이국적인 생김새도 근거로 언급된다. 다만 확정할 만한 증거는 없다.

또 다른 역사적 읽기도 있다. 처용을 지방 호족의 자제로 보고, 중앙에 인질처럼 머물게 한 상수리(上守吏) 제도와 연결하는 견해다. 동해 용의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벼슬을 받고 머물렀다는 구도가 그렇게 읽힌다는 것이다.

──

**노래 자체를 보면**

해석이 어떻든, 이 노래에는 이상한 힘이 있다.

다리가 넷이라는 표현. 자기 아내와 다른 남자가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처용은 사람을 세지 않고 다리를 센다.

그리고 둘은 내 것, 둘은 누구 것이냐고 묻는다. 답을 요구하는 물음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다.

마지막 줄 — 본디 내 것이다마는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분노도 없고 복수도 없다. 체념이라 하기에는 담담하고, 관용이라 하기에는 서늘하다.

그런데 이 태도가 역신을 물러가게 한다. 화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가 무릎을 꿇는다.

──

**문에 붙는 얼굴**

이 이야기의 결말은 처용의 얼굴이 부적이 된다는 것이다.

앞서 3부에서 본 비형랑도 그랬다. 귀신을 부리던 자의 이름이 귀신을 쫓는 부적이 됐다.

한국 민속에서 문에 무언가를 붙여 잡귀를 막는 관습은 오래됐다. 처용은 그 관습의 기원 설화 중 하나로 남았다.

그리고 처용무는 지금도 전한다. 조선 시대 궁중 정재로 정비됐고,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도 등재됐다.

──

**헌강왕 때의 신라**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다.

삼국유사는 이 조목에서 헌강왕 때 서울에서 지방까지 집과 담이 이어지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으며, 길에는 음악과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적는다. 태평성대의 묘사다.

그런데 같은 조목 뒤쪽에 다른 이야기가 이어진다. 왕이 여러 곳에 행차할 때마다 신들이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상서로운 조짐으로 여겼으나 실은 나라가 망할 징조였다는 것이다.

신들이 춤추며 경고했으나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했다는 서술이다.

헌강왕이 죽은 뒤 신라는 급속히 무너졌다. 진성여왕 때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곧 후삼국 시대로 들어갔다.

처용 이야기가 실린 자리가 바로 그 직전이다. 태평의 절정에서 부른 노래 옆에, 곧 닥칠 몰락의 조짐이 나란히 적혀 있다.

일연이 두 이야기를 한 조목에 넣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출처

관련 콘텐츠

이 글은 삼국유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지도에서 관련 지역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