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의 문두루 — 주술로 당나라 함대를 침몰시키다

670 · 경주 사천왕사

삼국유사 권5에 신주(神呪)편이 있다. 신령한 주문이라는 뜻이다. 밀교(密敎) 계통 승려들의 기이한 행적을 모은 편목으로, 세 조목뿐인 가장 짧은 편이다.

그중 하나가 명랑(明朗)의 이야기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기이편 「문무왕 법민」 조에도 자세히 실려 있다. 신라가 당나라와 싸운 전쟁의 한복판에 놓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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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이 적이 되다**

신라는 당과 연합해 660년 백제를, 668년 고구려를 무너뜨렸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 당은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려 했다. 옛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고구려 땅에 안동도호부를 두었고, 심지어 신라 땅에도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고 문무왕을 그 도독으로 삼았다. 형식상 신라를 당의 지방 행정 단위로 편입한 것이다.

신라는 싸우기로 했다. 670년부터 676년까지 이어진 나당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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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보**

삼국유사는 이렇게 전한다.

당 고종이 신라를 치려고 군사를 일으켰다. 이를 알고 신라 조정이 대책을 논의했다.

각간 김천존이 아뢰었다. 근래 명랑법사가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수받아 왔으니 그를 부르십시오.

명랑이 왔다. 왕이 말했다. 낭산 남쪽에 신유림(神遊林)이 있으니 그곳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을 열면 좋겠다.

그때 정주(지금의 개성 부근)에서 사자가 달려와 보고했다.

당나라 군사가 수없이 우리 국경에 이르러 바다 위를 순회하고 있습니다.

왕이 명랑을 불러 말했다. 일이 이미 급박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명랑이 답했다. 채색 비단으로 절을 임시로 지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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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두루 비법**

채색 비단으로 절 모양을 만들고, 풀로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었다.

유가(瑜伽)에 밝은 승려 열두 명이 명랑을 우두머리로 삼아 문두루비밀법(文豆婁秘密法)을 행했다.

그러자 당나라 배와 신라 배가 아직 맞붙기도 전에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물에 가라앉았다.

뒤에 그 자리에 절을 고쳐 짓고 사천왕사라 했다.

671년, 당이 조헌(趙憲)을 장수로 삼아 오만 군사를 이끌고 다시 왔다. 그때도 같은 법을 썼더니 배가 전과 같이 침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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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두루란 무엇인가**

문두루(文豆婁)는 산스크리트어 무드라(mudrā)를 소리 나는 대로 옮긴 말이다. 흔히 수인(手印)으로 번역되지만, 여기서는 신왕(神王)의 인(印)에 가까운 뜻으로 본다.

근거가 되는 경전은 『관정경(灌頂經)』이다. 그 안에 이런 대목이 있다 — 말세의 제자들이 위급한 액난을 만나면 오방신의 이름과 그 권속을 취해 둥근 나무 위에 만들어라. 이것을 문두루 비법이라 한다.

즉 다섯 방위의 신을 불러 재앙을 막는 밀교 의식이다.

명랑은 이 법을 신라에 전한 인물로, 신인종(神印宗)의 개조로 받들어진다. 신인(神印)은 문두루를 한자로 옮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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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사신을 속인 일**

삼국유사는 이어지는 일화도 전한다.

당은 배가 침몰한 이유를 알아보려 사신 악붕귀(樂鵬龜)를 보냈다. 신라가 절을 지어 황제의 수명을 빈다는 명목이었으니, 그 절을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신라는 사천왕사를 보여주면 비밀이 드러날 것을 우려해, 그 남쪽에 새 절을 지어 놓고 안내했다.

사신이 문 앞에 서서 말했다. 이것은 사천왕사가 아니라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다.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신라 사람들이 금 천 냥을 주니 그제야 돌아가 황제에게 신라가 절을 지어 황제의 수명을 빈다고 보고했다.

그 일로 그 절 이름을 망덕사(望德寺)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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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을 어떻게 읽을까**

먼저 사실관계를 짚자.

나당전쟁이 실제로 있었고 신라가 이겼다는 것은 분명하다. 675년 매소성 전투, 676년 기벌포 해전에서 신라가 당군을 물리쳤고, 당은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겼다. 사실상 한반도에서 철수한 것이다.

사천왕사도 실재한다. 679년 완성됐고, 지금 경주 낭산 남쪽에 터가 남아 있다. 앞서 선덕여왕 편에서 본 도리천 이야기의 그 절이다.

그렇다면 문두루 비법으로 당 함대가 침몰했다는 기록은 무엇인가.

해상에서 폭풍으로 함대가 손실을 입는 일은 실제로 드물지 않다. 그런 일이 있었고, 그것이 마침 의식을 행한 시점과 겹쳤을 수 있다.

다만 이 기록이 말해주는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신라가 당과 정면으로 싸우면서 종교적 의식을 국가 차원에서 동원했다는 사실이다.

**국가와 밀교**

밀교는 주술적 성격이 강한 불교 흐름이다. 개인의 깨달음보다 현세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초점이 있다. 병을 고치고, 비를 부르고, 적을 물리친다.

국가로서는 활용도가 높다. 실제로 신라는 사천왕사에 사천왕사성전이라는 관청을 두어 관리했다. 종교 시설이 국가 기구에 편입된 것이다.

앞 편에서 본 황룡사 구층탑, 만파식적도 같은 계열이다. 신라의 호국 불교는 이런 구체적인 장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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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편이라는 자리**

신주편은 세 조목뿐이다. 밀본법사, 혜통, 그리고 명랑이다.

밀본은 주문으로 왕의 병을 고쳤고, 혜통은 독룡을 항복시켰으며, 명랑은 당 함대를 침몰시켰다.

의해편이 교학을 세운 고승들의 자리라면, 신주편은 다른 종류의 힘을 다룬다. 경전을 해석하는 능력이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움직이는 능력이다.

일연이 이 편목을 따로 둔 것은, 그런 능력 또한 불교의 한 부분으로 인정했다는 뜻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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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주술로 함대를 침몰시켰다는 기록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7세기 신라 사람들에게 그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고, 그들은 그 힘을 믿었기 때문에 절을 짓고 관청을 두었다.

무엇을 믿었는가는 무엇이 사실인가와 다른 질문이다. 그리고 역사를 이해하는 데는 두 질문이 다 필요하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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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삼국유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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