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명사 — 죽은 누이에게 부르는 노래

760 · 경주 사천왕사

삼국유사 감통편에 「월명사 도솔가(月明師 兜率歌)」라는 조목이 있다. 월명사라는 승려가 지은 두 편의 향가가 여기 실려 있다. 하나는 「도솔가」, 다른 하나는 「제망매가(祭亡妹歌)」다.

두 번째 노래가 한국 고전시가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작품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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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둘 나타나다**

경덕왕 19년(760년) 4월, 하늘에 해가 둘 나타나 열흘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일관이 아뢰었다. 인연 있는 승려를 청해 산화공덕(散花功德)을 하면 물리칠 수 있습니다. 꽃을 뿌려 부처에게 공양하는 의식이다.

조원전에 단을 깨끗이 만들고 왕이 청양루에 나가 인연 있는 승려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때 월명사가 밭 사이 남쪽 길을 지나고 있었다. 왕이 사람을 보내 불러오게 하고 단을 열어 기도문을 짓게 했다.

월명사가 아뢰었다. 저는 국선의 무리에 속해 향가만 알 뿐, 범패(梵唄)에는 익숙하지 못합니다.

왕이 말했다. 이미 인연 있는 승려로 뽑혔으니 향가를 써도 좋다.

월명사가 「도솔가」를 지어 불렀다. 얼마 뒤 해의 변괴가 사라졌다.

왕이 기뻐하며 좋은 차 한 봉과 수정 염주 백여덟 개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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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와 염주가 사라지다**

그때 홀연히 곱게 생긴 동자 하나가 나타나 차와 염주를 받들고 대궐 서쪽 작은 문으로 나갔다.

월명사는 그 동자가 궁궐의 심부름꾼인 줄 알았고, 왕은 법사의 시종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아보니 둘 다 아니었다.

왕이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뒤쫓게 했다. 동자는 내원(內院)의 탑 안으로 사라졌고, 차와 염주는 남쪽 벽에 그려진 미륵상 앞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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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누이를 위한 재**

월명사에게는 누이가 있었는데, 먼저 세상을 떠났다.

월명사가 죽은 누이를 위해 재를 올리고 향가를 지어 제사했다.

그때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 지전(紙錢)을 서쪽으로 날려 보냈다.

서쪽은 서방정토가 있는 방향이다.

그 노래가 「제망매가」다. 열 줄로 된 향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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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길은 / 여기 있으매 두려워하고 / 나는 간다는 말도 / 못 다 이르고 갔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 한 가지에 나고서도 /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

아아, 미타찰(彌陀刹)에서 만날 나 / 도(道) 닦아 기다리겠노라

(향찰로 기록된 원문을 현대어로 옮긴 것으로, 학자마다 해독이 조금씩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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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가 특별한 이유**

열 줄짜리 향가는 대개 4-4-2 구조를 갖는다. 앞의 여덟 줄에서 상황과 감정을 전개하고, 마지막 두 줄에서 전환한다. 그 아홉 번째 줄은 대개 감탄사로 시작한다.

제망매가도 그 구조를 따른다. 그런데 각 부분이 하는 일이 특히 선명하다.

첫 네 줄은 죽음 앞에 선 사람의 상태다. 삶과 죽음의 길이 바로 여기 있다는 것, 그것이 두렵다는 것. 그리고 누이가 간다는 말도 못 하고 갔다는 것.

다음 네 줄이 이 노래의 핵심으로 꼽힌다. 한 가지에서 난 잎들이 이른 가을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진다. 같은 부모에게서 난 남매가 각각 다른 곳으로 흩어진다는 비유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이 아프다.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그것이 끝이어서가 아니라,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두 줄에서 전환이 일어난다. 미타찰 — 아미타불의 정토에서 만날 것이니, 도를 닦으며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이 전환을 두고 해석이 갈린다. 슬픔이 종교적 확신으로 극복됐다고 보는 읽기가 일반적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극복이라기보다 견디기 위한 약속에 가깝다고 보는 읽기도 있다.

어느 쪽이든, 앞의 여덟 줄이 담은 슬픔이 마지막 두 줄로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노래가 오래 읽히는 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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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멈춘 길**

삼국유사는 월명사에 대해 한 가지를 더 적는다.

월명사는 늘 사천왕사에 살았고, 피리를 잘 불었다.

어느 달 밝은 밤에 문 앞 큰길에서 피리를 부니, 달이 그 소리에 가기를 멈추었다.

그래서 그 길을 월명리(月明里)라 했고, 월명사도 이 일로 이름이 알려졌다.

일연은 조목 끝에 시를 붙이며 이렇게 적었다. 신라 사람들이 향가를 숭상한 것이 오래되었으니, 대개 시나 송(頌)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가끔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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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가가 남은 자리**

오늘날 전하는 향가는 스물다섯 수쯤 된다. 그중 열네 수가 삼국유사에 있고, 열한 수가 『균여전』에 있다.

『균여전』의 열한 수는 고려 초 균여대사가 지은 불교 노래다. 그러니 신라 시대의 향가는 사실상 삼국유사에 실린 열네 수가 전부인 셈이다.

김부식은 향가를 한 수도 싣지 않았다. 정사의 체제에서 노래는 사료가 아니었다.

일연은 실었다. 그것도 향찰 표기 그대로 실었다.

향찰은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는 방식이다. 이 표기가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라 사람들이 어떤 소리로 말했는지, 어떤 문법을 썼는지 연구할 수 있다. 국어사 연구에서 이 열네 수의 가치는 대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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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승려가 죽은 누이를 위해 부른 노래가 1300년쯤 전해졌다.

그 노래를 지은 사람도, 그 노래를 받은 누이도, 그것을 옮겨 적은 승려도 모두 오래전에 죽었다. 남은 것은 열 줄의 글자뿐이다.

그런데 그 열 줄이 아직도 읽힌다. 한 가지에서 났는데 가는 곳을 모른다는 문장이, 여전히 누군가의 슬픔에 가 닿는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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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삼국유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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