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년 7월, 나당연합군 13만이 사비성을 조여 오자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웅진성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닷새 뒤 항복했다 — 여기까지가 오래된 이야기다. 김부식은 백제본기의 끝에 사론(史論)을 달아 판결을 내렸다. 백제는 말기에 무도하여 이웃과 원한을 맺고 대국에 죄를 얻었으니 그 멸망은 당연하다는 취지다. 의자왕 개인에게는 주색과 향락의 초상이 덧씌워졌고, 후대는 거기에 살을 붙였다 —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는 정작 삼국사기에도 삼국유사에도 없다. '삼천'이라는 숫자는 조선시대 문인들의 시에서 처음 등장하는, 문학이 만든 이미지다.
그런데 2000년대, 중국 시안의 땅속에서 이 판결문을 흔드는 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예식진(禰寔進) 묘지명 — 그는 백제 웅진성의 수비 책임자, 그러니까 의자왕이 항전을 위해 몸을 의탁한 바로 그 성의 성주였다. 묘지명은 그가 당에서 좌위위대장군이라는 파격적인 고위직에 올랐음을 보여준다. 나라 잃은 항장이 받을 수 있는 대우가 아니다. 이어 형 예군의 묘지명, 그리고 후손의 묘지명까지 확인되면서 정황은 짙어졌다. 당의 정사 『신당서』의 한 구절이 새로 읽히기 시작했다 — "그 대장 예식이 왕을 데리고 와서 항복했다(將其王來降)." 데리고 왔다는 것.
여기서 근거의 층위를 정확히 구분해 적는다 — 이것이 이 시리즈의 원칙이다. 예식진 본인의 묘지명에 "왕을 사로잡았다"는 문장이 새겨져 있는 것은 아니다. 배신 포박설은 ① 신당서의 표현, ② 항장에게는 설명되지 않는 파격 서훈, ③ 후손 묘지명의 정황 서술을 겹쳐 읽은 재해석이며, 학계의 유력한 흐름이지만 신중론도 있다. 다만 이 재해석이 서면, 그림은 뒤집힌다. 의자왕은 사비를 버리고 도망친 것이 아니라 방어에 유리한 웅진으로 옮겨 항전을 이어가려 했고, 그 항전은 당군이 아니라 부하의 배신에 의해 닷새 만에 끝났다는 것. 즉위 전 '해동증자'로 불렸고 즉위 초 신라의 40여 성을 빼앗은 정복군주의 마지막으로는, 이쪽이 훨씬 앞뒤가 맞는다.
김부식이 이 사정을 알았을 가능성은 낮다 — 그는 그가 가진 기록과 그가 선 자리에서 썼다. 신라의 후예에게 백제 멸망은 통일의 정당성 그 자체였고, 금나라의 그림자 아래 살던 재상에게 "대국에 죄를 얻으면 망한다"는 당대의 정치학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장면의 의미는 김부식 개인의 단죄가 아니다. 승자의 사론이 천년 이상 한 왕의 초상을 결정해 왔고, 이제 땅속에서 나온 돌들이 그 초상에 금을 내고 있다는 것 — 역사가 완결된 판결문이 아니라 계속 갱신되는 재판이라는 사실의, 가장 극적인 실물 증거가 여기 있다. MKHZ는 이 재평가된 서사를 판타지 뮤직드라마 〈마지막 백제의 노래 — 그들은 뛰어내리지 않았다〉로 만들었다. 아래 영상에서 그 이야기를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