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10월 말, 벨기에의 화학 기업가 에르네스트 솔베이가 사재를 들여 유럽 최고의 물리학자들을 브뤼셀 메트로폴 호텔로 초청했다. 주제는 "복사 이론과 양자" — 플랑크의 양자 가설이 열어놓은 균열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로런츠가 의장을 맡고 플랑크, 마리 퀴리, 러더퍼드, 푸앵카레 등이 둘러앉았다. 32세의 아인슈타인은 최연소급 참석자였다. 특정 국가나 대학이 아니라 "문제 하나"를 놓고 각국의 정상급 학자들이 모여 며칠씩 토론하는 이런 형식의 국제 학술회의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발명이었고, 이후 솔베이 회의는 20세기 물리학의 정상회담으로 자리 잡는다. 이 첫 회의는 답을 내지 못했다 — 오히려 참석자 대부분이 "고전물리학으로는 안 된다"는 불편한 진실을 공유하게 된 자리에 가까웠다. 그러나 문제를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과학이 전진하는 방식이었다. 회의의 유일한 여성 참석자였던 마리 퀴리는 바로 이 무렵 두 번째 노벨상(화학상) 수상 소식을 들었다. 16년 뒤 같은 호텔에서 열릴 제5차 회의에서 양자역학의 운명을 건 세기의 논쟁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이때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제1차 솔베이 회의 — 물리학, 처음으로 한 방에 모이다
출처
- [단행본] 양자혁명: 양자물리학 100년사
- [단행본] 퀀텀스토리: 양자역학 100년의 결정적 순간들
- [기록보존소] International Solvay Institutes — History
이 글은 양자역학 100년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