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3만 군대가 한성을 에워쌌다. 이레 만에 성이 떨어지고 개로왕은 아차산성 아래로 끌려가 죽었다. 오백 년 도읍이 하루아침에 없어졌고, 살아남은 아들 문주왕은 남은 사람들을 데리고 금강 가의 웅진, 지금의 공주로 내려갔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지키기는 좋지만 들이 좁아 나라를 키우기는 어려운 땅이었다.
그 뒤 스물여섯 해가 백제사에서 가장 어두운 구간이다. 문주왕은 병관좌평 해구에게 죽고, 어린 삼근왕도 두 해 만에 죽는다. 뒤를 이은 동성왕은 스물세 해를 버텼지만 결국 위사좌평 백가가 보낸 자객의 칼에 사냥터에서 쓰러진다. 왕 셋이 잇따라 신하 손에 죽은 나라, 그것이 무령왕이 물려받은 백제였다.
우리가 백제를 약한 나라로 기억하는 것도 대체로 이 구간의 인상 때문이다. 그런데 무령왕이 죽고 나서 양나라에 보낸 국서에는 이런 말이 있다. "여러 번 고구려를 깨뜨려 이제 비로소 우호를 통하게 되었으며,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 무너진 나라가 어떻게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는가 — 이 시리즈는 그 사이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