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본의 여정 — 도쿄, 관동대지진, 그리고 100년 뒤

1913 · 평창 오대산사고 → 도쿄 → 서울

다섯 사고 중 하나였던 오대산 사고본은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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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쇄본이라는 것**

먼저 이 실록의 특별한 점부터 짚자.

임진왜란 뒤 실록을 다시 찍을 때, 조선 정부는 네 부를 만들려 했다. 그런데 전쟁 직후라 재정이 어려웠다.

네 부 중 세 부는 정본으로 제대로 인쇄했다. 나머지 한 부는 그럴 형편이 안 됐다.

그래서 최종 교정쇄본 — 인쇄 전 교정을 본 상태의 종이 — 을 묶어 정본을 대신하게 했다.

그 교정쇄본이 오대산 사고에 들어갔다.

따라서 오대산 사고본 실록 중 태조~명종실록은 교정쇄본이고, 그 뒤에 넣은 선조~철종실록은 정본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교정쇄본에는 교정 표시가 남아 있다. 어떤 글자를 어떻게 고쳤는지 볼 수 있다. 다른 사고본에는 없는 정보다.

형편이 어려워 만든 임시방편이 오히려 특별한 자료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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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반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고 3년 뒤인 1913년경, 오대산 사고본 실록이 일본으로 반출됐다.

형식은 도쿄제국대학 도서관에 기증하는 것이었다. 조선총독부가 주관했다.

기증이라는 형식을 취했지만, 식민지 조선의 문화재가 본국 대학으로 옮겨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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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관동대지진**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다.

도쿄제국대학 도서관에 불이 났다. 그곳에 있던 오대산 사고본 실록 대부분이 탔다.

(이 지진 직후 일본에서 조선인 학살이 벌어졌다. 그 이야기는 별도의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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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것들**

화재를 면한 실록이 일부 있었다.

그중 27책이 1932년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됐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로 이어졌고, 규장각에 보관됐다.

이 27책이 1973년 국보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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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남은 것들**

그런데 도쿄대학에 여전히 남아 있는 실록이 있었다.

2000년대 들어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환수 운동이 시작됐다. 불교계와 시민단체, 강원도와 평창군 등이 참여했다.

오대산 사고를 관리했던 것이 월정사였기 때문에, 불교계가 앞장섰다.

2006년, 도쿄대학이 서울대학교에 47책을 인도했다. 형식은 기증이었다.

환수 방식을 두고 논의가 있었다. 약탈당한 문화재를 돌려받는 것인데 기증 형식을 취하는 것이 맞느냐는 문제 제기였다. 그럼에도 실물이 돌아온 것에 의미를 두는 견해가 우세했다.

2007년, 이 47책도 국보로 추가 지정됐다.

2018년에 1책이 더 환수됐고, 2019년 국보로 추가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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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현재 오대산 사고본 실록 75책이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27책(경성제대 경유) + 47책(2006년 환수) + 1책(2018년 환수) = 75책이다.

원래 오대산 사고에 있던 실록이 몇 책이었는지를 생각하면, 돌아온 것은 일부다. 나머지는 1923년에 타서 사라졌다.

2023년에는 오대산 사고본과 관련 유물을 전시하는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이 평창 월정사 인근에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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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고본들의 현재**

**정족산 사고본** — 전주 사고에서 살아남은 원본 계열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있다. 낙질이 거의 없는 완질에 가깝다.

**태백산 사고본** — 국가기록원 부산기록관에 있다.

**적상산 사고본** — 한국전쟁 중 북한으로 옮겨졌다. 김일성종합대학에 소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춘추관 사고본** — 이괄의 난 등을 거치며 대부분 소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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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유네스코**

1997년 10월, 조선왕조실록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같은 해 훈민정음 해례본도 함께 등재됐다. 한국의 첫 세계기록유산 두 건이다.

등재 사유로는 방대한 분량, 오랜 기간의 연속성, 편찬의 객관성을 담보하려 한 제도, 그리고 보존 체계가 언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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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화**

1990년대 후반부터 실록 전산화 사업이 진행됐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원문과 번역문을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했고, 2005년 인터넷에 전면 공개했다.

지금은 누구나 웹사이트에서 실록을 검색해 읽을 수 있다. 원문 이미지, 한문 원문, 국역문이 함께 제공된다.

왕도 볼 수 없었던 기록이, 이제는 접속만 하면 읽을 수 있는 자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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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이 지나온 길**

오대산 사고본을 기준으로 정리해 보자.

1606년 강원도 산속 사고에 봉안됐다. 300년 동안 그곳에 있었다. 2~3년마다 사람이 올라와 책을 꺼내 말렸다.

1913년 도쿄로 갔다. 1923년 지진과 화재로 대부분 탔다. 살아남은 일부가 1932년 경성으로 돌아왔다.

2006년과 2018년, 나머지가 돌아왔다.

2023년, 그 책들을 위한 박물관이 원래 있던 산 근처에 세워졌다.

400년이 넘는 여정이다.

출처

이 글은 조선왕조실록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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