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은 자기 기록을 볼 수 없었다.
이 문장을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절대군주라 불리는 사람이, 자기에 관해 무엇이 적히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
**사관은 어디에 있었나**
사관은 왕의 곁에 있었다.
왕이 신하를 만나는 자리, 국정을 논하는 자리, 경연에서 공부하는 자리에 함께 앉아 오가는 말을 적었다.
예문관의 봉교·대교·검열 여덟 명이 이 일을 맡았다. 품계는 낮았다. 검열은 정9품으로, 관료 서열에서 가장 아래쪽이다.
그런데 이 낮은 관원들이 왕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
**보여주지 않는다는 원칙**
원칙은 이렇다. 사초는 사관 외에 누구도 볼 수 없다. 왕도 예외가 아니다.
실록도 마찬가지다. 완성되어 사고에 봉안된 뒤에는 함부로 열람할 수 없었다. 국정 운영에 꼭 필요한 경우 관련 부분을 참고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절차가 까다로웠다.
왕들은 이 원칙을 자주 시험했다. 자기 아버지의 실록을 보고 싶어 했고, 자기에 관해 무엇이 적혔는지 궁금해했다.
그때마다 신하들이 반대했다. 왕이 실록을 보기 시작하면 사관이 두려워 바른 말을 적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역사가 무너진다는 논리였다.
대개 왕이 물러섰다.
──
**태종의 일화**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태종 때 있었다.
태종이 사냥을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일어나면서 좌우를 둘러보고 말했다.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런데 그 말까지 사초에 적혔다.
이 일화는 실록에 실려 있다. 왕이 감추라고 한 말이 감춰지지 않고 기록에 남았다는 것 자체가 이 제도의 성격을 보여준다.
(다만 이 일화가 실제로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기록됐는지는 원문을 직접 확인해야 정확하다. 널리 인용되면서 세부가 조금씩 달라진 판본들이 돌아다닌다.)
──
**직필이라는 요구**
사관에게 요구된 것은 직필(直筆)이었다. 곧게 쓴다는 뜻이다.
목이 달아나는 한이 있어도 붓을 굽히지 않는다 — 이것이 사관의 사명으로 이야기됐다.
중국 고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제나라에서 최저가 임금을 죽이자 사관이 최저가 임금을 죽였다고 적었다. 최저가 그를 죽였다. 그 동생이 같은 문장을 적었다. 또 죽였다. 셋째 동생이 또 같은 문장을 적자, 최저가 결국 포기했다.
조선의 사관들이 배운 것이 이런 이야기였다.
──
**그러나 현실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실록 해제는 이 문제를 솔직하게 적고 있다.
실제로는 사관들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 직필을 기피하는 경우가 있었고, 엄격한 금지에도 불구하고 사초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삭제하거나 고쳐 쓰는 일이 없지 않았다는 것이다.
앞 편에서 본 실명 기입 제도가 그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자기 이름이 남으니 함부로 쓸 수 없었다.
제도는 원칙을 세웠지만, 그 원칙을 지키는 것은 개별 인간의 몫이었다. 그리고 인간은 두려움을 느낀다.
──
**이 제도가 겨냥한 것**
그럼에도 이 제도의 설계 의도는 분명하다.
왕은 자기가 무엇으로 기억될지 통제할 수 없다. 자기 시대의 기록을 볼 수 없고, 고칠 수도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기록될 만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권력을 제약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법으로 묶거나, 다른 권력과 경쟁시키거나, 임기를 정하거나.
조선이 선택한 방법 중 하나는 기록이었다. 후세의 시선을 현재의 권력자에게 부담으로 지우는 방식이다.
──
**그리고 이 원칙을 깬 왕**
이 제도는 500년 가까이 유지됐다. 그러나 정면으로 깨진 적이 있다.
연산군 4년, 1498년이었다.
왕이 사초를 보겠다고 했고, 실제로 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 적힌 내용을 근거로 사람들을 죽였다.
조선 최초의 사화, 무오사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