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이 완성되고 인쇄가 끝나면, 조선의 관료들은 이상한 일을 했다.
그때까지 쓴 모든 원고를 물에 씻어 없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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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초(洗草)**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초고를 씻는다는 뜻이다.
대상은 이렇다. 사관들이 제출한 사초, 춘추관이 정리한 시정기, 그리고 편찬 과정에서 만든 초초와 중초, 심지어 정초까지.
종이를 물에 담가 먹물을 풀어 글자를 지웠다. 그리고 그 종이를 재생해서 다시 썼다.
장소는 주로 세검정 근처의 차일암(遮日巖)이었다. 지금 서울 종로구 신영동, 홍제천이 흐르는 곳이다. 넓은 바위가 있어 종이를 펼쳐 말리기 좋았다.
세초가 끝나면 세초연(洗草宴)이라는 잔치를 벌였다. 큰 일을 마쳤으니 수고를 위로하는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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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없앴나**
두 가지 이유가 전한다.
**첫째, 기밀 누설을 막기 위해서다.** 사초에는 신하들에 대한 사관의 평가, 왕과 신하 사이의 미묘한 대화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이것이 유출되면 정치적 파장이 컸다.
**둘째, 정쟁의 빌미를 없애기 위해서다.** 최종 편찬된 실록과 다른 내용의 자료가 남아 있으면, 뒷날 그것을 근거로 실록이 왜곡됐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었다.
앞 편에서 본 무오사화가 정확히 그런 사건이다. 사초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사람들이 죽었다. 다음 편에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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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현대의 기록관리 기준에서 보면 세초는 이해하기 어려운 관행이다.
오늘날 기록관리의 원칙은 원본 보존이다. 최종 보고서만 남기고 초안과 근거 자료를 파기하면, 그 보고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검증할 수 없다.
실록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실록을 읽을 수 있지만, 그것이 어떤 자료에서 어떻게 취사선택됐는지는 알 수 없다. 편찬자들이 무엇을 뺐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러니 세초는 실록의 신뢰성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남긴다.
**반론도 가능하다.** 당대의 맥락에서 보면 세초는 오히려 기록을 지키는 장치였다는 견해가 있다.
사초가 남아 있으면 권력자가 그것을 뒤져 사관을 처벌할 수 있다. 사관은 그것이 두려워 처음부터 솔직하게 쓰지 못한다. 반면 실록으로 편찬된 뒤 원본이 사라지면, 사관 개인을 추적할 근거도 사라진다.
즉 세초는 사관을 보호하는 장치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 논리는 사초에 사관의 실명을 적게 한 제도와는 어긋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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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예외 — 광해군일기**
모든 실록의 초고가 사라졌지만, 딱 하나 예외가 있다.
『광해군일기』다. 중초본과 정초본이 모두 남아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활자로 인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난 뒤 그의 일기가 편찬됐는데, 당시 재정이 어려워 인쇄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필사본 상태로 사고에 봉안됐고, 세초도 이뤄지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는 편찬 과정에서 무엇이 어떻게 고쳐졌는지 볼 수 있는 유일한 사례를 갖게 됐다. 중초본에는 삭제 표시와 수정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연구자들에게 이 자료의 가치는 매우 크다. 실록이 어떤 원칙으로 편집됐는지 실제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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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초의 시작**
세초가 언제부터 시행됐는지는 오랫동안 명확하지 않았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를 겪고 나서 시작됐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 사초 때문에 화를 당했으니 아예 없애기로 했다는 논리다.
그런데 성종실록 편찬 관련 기록인 『성묘보전세초록』이 발견되면서, 세초가 그 이전부터 시행되고 있었음이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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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질문**
조선은 왕도 볼 수 없는 기록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만든 재료는 스스로 없앴다.
남긴 것과 없앤 것 사이의 이 선택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간단히 정리되지 않는다.
다만 하나는 분명하다. 그들은 무엇을 남길지에 대해 오래 고민했고, 그 고민의 결과가 이 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