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초 — 다 쓰고 나서 원고를 물에 씻다

1450 · 한양 세검정 차일암

실록이 완성되고 인쇄가 끝나면, 조선의 관료들은 이상한 일을 했다.

그때까지 쓴 모든 원고를 물에 씻어 없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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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초(洗草)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초고를 씻는다는 뜻이다.

대상은 이렇다. 사관들이 제출한 사초, 춘추관이 정리한 시정기, 그리고 편찬 과정에서 만든 초초와 중초, 심지어 정초까지.

종이를 물에 담가 먹물을 풀어 글자를 지웠다. 그리고 그 종이를 재생해서 다시 썼다.

장소는 주로 세검정 근처의 차일암(遮日巖)이었다. 지금 서울 종로구 신영동, 홍제천이 흐르는 곳이다. 넓은 바위가 있어 종이를 펼쳐 말리기 좋았다.

세초가 끝나면 세초연(洗草宴)이라는 잔치를 벌였다. 큰 일을 마쳤으니 수고를 위로하는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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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없앴나

두 가지 이유가 전한다.

첫째, 기밀 누설을 막기 위해서다. 사초에는 신하들에 대한 사관의 평가, 왕과 신하 사이의 미묘한 대화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이것이 유출되면 정치적 파장이 컸다.

둘째, 정쟁의 빌미를 없애기 위해서다. 최종 편찬된 실록과 다른 내용의 자료가 남아 있으면, 뒷날 그것을 근거로 실록이 왜곡됐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었다.

앞 편에서 본 무오사화가 정확히 그런 사건이다. 사초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사람들이 죽었다. 다음 편에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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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현대의 기록관리 기준에서 보면 세초는 이해하기 어려운 관행이다.

오늘날 기록관리의 원칙은 원본 보존이다. 최종 보고서만 남기고 초안과 근거 자료를 파기하면, 그 보고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검증할 수 없다.

실록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실록을 읽을 수 있지만, 그것이 어떤 자료에서 어떻게 취사선택됐는지는 알 수 없다. 편찬자들이 무엇을 뺐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러니 세초는 실록의 신뢰성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남긴다.

반론도 가능하다. 당대의 맥락에서 보면 세초는 오히려 기록을 지키는 장치였다는 견해가 있다.

사초가 남아 있으면 권력자가 그것을 뒤져 사관을 처벌할 수 있다. 사관은 그것이 두려워 처음부터 솔직하게 쓰지 못한다. 반면 실록으로 편찬된 뒤 원본이 사라지면, 사관 개인을 추적할 근거도 사라진다.

즉 세초는 사관을 보호하는 장치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 논리는 사초에 사관의 실명을 적게 한 제도와는 어긋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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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예외 — 광해군일기

모든 실록의 초고가 사라졌지만, 딱 하나 예외가 있다.

『광해군일기』다. 중초본과 정초본이 모두 남아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활자로 인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난 뒤 그의 일기가 편찬됐는데, 당시 재정이 어려워 인쇄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필사본 상태로 사고에 봉안됐고, 세초도 이뤄지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는 편찬 과정에서 무엇이 어떻게 고쳐졌는지 볼 수 있는 유일한 사례를 갖게 됐다. 중초본에는 삭제 표시와 수정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연구자들에게 이 자료의 가치는 매우 크다. 실록이 어떤 원칙으로 편집됐는지 실제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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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초의 시작

세초가 언제부터 시행됐는지는 오랫동안 명확하지 않았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를 겪고 나서 시작됐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 사초 때문에 화를 당했으니 아예 없애기로 했다는 논리다.

그런데 성종실록 편찬 관련 기록인 『성묘보전세초록』이 발견되면서, 세초가 그 이전부터 시행되고 있었음이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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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질문

조선은 왕도 볼 수 없는 기록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만든 재료는 스스로 없앴다.

남긴 것과 없앤 것 사이의 이 선택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간단히 정리되지 않는다.

다만 하나는 분명하다. 그들은 무엇을 남길지에 대해 오래 고민했고, 그 고민의 결과가 이 제도였다.

출처

이 글은 조선왕조실록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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