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이 남긴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1863 · 한양

3백 년의 계보를 따라왔다. 이제 정리할 시간이다.

먼저 계보를 한 줄로 세우면 이렇다.

사림이 훈구와 싸우며 네 번의 사화를 겪었다(1498~1545). 훈구가 사라지자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렸다(1575). 기축옥사의 처리를 두고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렸다(1589 이후). 북인이 광해군과 함께 집권했다가 인조반정으로 소멸했다(1623). 서인이 집권하고 남인이 야당으로 공존했다. 예송논쟁으로 두 차례 정권이 오갔다(1659, 1674). 숙종 대의 세 차례 환국으로 남인이 몰락했다(1680, 1689, 1694). 그 사이 서인이 회니시비를 계기로 노론과 소론으로 갈렸다(1684 전후). 왕위 계승을 두고 노론과 소론이 신임옥사로 충돌했다(1721~22). 영조가 탕평으로 봉합했으나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시파와 벽파가 갈렸다(1762). 정조 사후 붕당 자체가 무너지고 세도정치가 왔다(1804 무렵).

이 계보에서 반복되는 형태가 몇 가지 보인다.

첫째, 공동의 적이 사라지면 반드시 갈라졌다. 훈구가 사라지자 사림이 갈렸고, 남인이 몰락하자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렸다. 통합은 대개 외부의 적이 만든 것이었고, 그 적이 사라지면 통합도 사라졌다.

둘째, 분열의 계기는 대체로 사소했다. 이조전랑 자리 하나, 묘갈명 한 편, 상복 몇 년. 그러나 그 사소한 계기가 이미 존재하던 학맥과 지역의 결을 따라 갈라지면서 큰 균열이 됐다. 계기가 원인은 아니었다.

셋째, 논쟁의 주제가 갈수록 사적인 영역으로 이동했다. 초기에는 인사 원칙과 예학의 해석을 다투었다. 후기로 갈수록 왕실의 후계, 후궁의 아들, 세자의 병으로 옮겨갔다. 공적 쟁점이 줄어들수록 정치는 줄서기가 됐다.

넷째, 지는 쪽의 대가가 계속 무거워졌다. 초기의 분당은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끝났다. 환국 이후로는 사약과 멸문으로 이어졌다. 대가가 무거워질수록 타협은 불가능해졌다. 지면 죽는 게임에서 물러설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배울 것인가.

가장 흔한 교훈은 분열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리즈가 따라온 계보는 다른 것을 말한다. 조선이 가장 나빴던 시기는 분열이 극심하던 때가 아니라, 분열이 사라지고 한 가문이 모든 것을 쥔 때였다. 세도정치 60년 동안 정치적 대립은 거의 없었다. 대신 매관매직과 삼정의 문란, 그리고 전국적인 민란이 있었다.

그러므로 문제는 여러 세력이 다투는 것 자체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 다툼이 어떤 규칙 아래 있느냐였다.

붕당 정치가 그나마 작동하던 17세기에는 규칙이 있었다. 상대의 존재를 인정했고, 주장에는 학문적 근거를 대야 했으며, 공론의 장에서 비판을 받았다. 이 규칙이 무너진 것은 두 가지 때문이었다. 지면 죽는 구조가 만들어졌고, 왕실의 사적 문제가 정치의 중심이 됐다.

여기서 오늘로 이어지는 질문이 나온다.

정치적 경쟁에서 지는 쪽이 감당해야 할 대가는 어디까지가 적정한가. 대가가 너무 가벼우면 책임이 없고, 너무 무거우면 타협이 불가능해진다. 조선 후기는 후자의 극단이었다.

논쟁의 주제가 공적 영역에 머물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정책이 아니라 인물의 사생활과 진영 소속이 정치의 중심이 될 때, 조선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시리즈가 내내 던져온 질문. 나였다면 어느 쪽에 섰겠는가.

예송에서 왕도 사대부와 같은 예를 따라야 한다고 말한 쪽에 설 것인가, 왕은 다르다고 말한 쪽에 설 것인가. 신임옥사에서 후계를 미리 정해 혼란을 막자는 쪽인가, 현직 왕의 권한을 존중하자는 쪽인가. 탕평에서 시비를 가리자는 쪽인가, 일단 봉합하자는 쪽인가.

이 질문들에 쉽게 답이 나온다면, 아마 그 질문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3백 년 전 사람들은 이 질문들 앞에서 목숨을 걸었다. 그들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질문이 정말로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출처

관련 콘텐츠

이 글은 조선 붕당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지도에서 관련 지역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