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 이후 — 서인이 남인을 남겨둔 이유

1623 3월 · 한양 창덕궁

1623년의 반정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았다. 이후 조선이 망할 때까지 서인과 그 후신인 노론은 몇 차례의 짧은 중단을 빼면 계속 집권한다. 250년에 걸친 장기 집권의 시작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서인이 남인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북인은 뿌리째 뽑았으면서 남인은 조정에 남겨두었다. 여기에는 계산이 있었다.

하나는 명분이었다. 반정으로 집권한 정권이 반대 세력을 전멸시키면 그 자체가 폭정의 증거가 된다. 광해군의 폐모살제를 명분으로 일으킨 반정이 같은 짓을 하면 스스로를 부정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실질적인 필요였다. 조정에 반대 의견이 아예 없으면 왕이 서인 전체를 견제할 수단을 잃는다. 오히려 왕이 서인을 통제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남인을 일정 규모로 남겨 균형을 유지하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서인 주도, 남인 참여의 공존 체제다.

17세기 중반의 붕당 정치가 그나마 건강하게 작동했다고 평가받는 것은 이 시기다. 상대 당의 존재를 인정하고, 공론의 장에서 논쟁하며, 학문적 근거로 다투었다. 현대 학계가 붕당을 단순한 파벌 싸움이 아니라 공론 정치의 한 형태로 보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 균형에는 대가가 있었다. 반정 세력의 명분이 친명배금이었으므로 외교 노선의 재조정이 어려웠고,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불렀다. 1637년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반정의 명분이 나라를 지키지 못한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조선의 지배층은 오랑캐에게 무릎 꿇었다는 치욕을 사상으로 감당해야 했다. 그 답이 북벌론과 소중화 의식이었다. 명은 망했으나 중화의 문명은 조선이 잇는다는 자의식이다. 효종은 북벌을 국시로 내걸었고 송시열이 그 이념적 기둥이 됐다.

이 북벌론이 실제로 얼마나 실행 가능했는지, 혹은 애초에 실행할 의도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린다. 국방력 강화라는 실질적 효과를 인정하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실현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정권의 정당성을 위해 유지된 명분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확실한 것은 그 다음이다. 효종이 죽자, 바로 그 효종의 장례에서 무엇을 입을 것인가를 두고 조선 최대의 사상 논쟁이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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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 붕당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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