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9년, 전주 출신의 정여립이 모반을 꾀했다는 고변이 들어왔다. 그는 대동계라는 조직을 만들어 활을 익히게 하고 있었고, 왜구를 격퇴한 실적도 있었다. 관군이 포위하자 진안 죽도에서 죽었다. 자결로 기록됐다.
문제는 그 뒤였다. 서인 정철이 위관을 맡아 국문을 주관하면서 옥사는 3년을 끌었고, 연루자로 지목되어 죽거나 유배된 사람이 천 명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최영경, 이발 등 동인의 핵심 인사들이 대거 희생됐다. 조선 최대 규모의 옥사였다.
정여립이 실제로 모반을 꾀했는지는 오늘날까지 논쟁거리다. 그가 천하는 공물이라 주인이 따로 없다고 말했다는 기록을 두고 급진적 사상가로 보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고변 자체가 조작이었다는 견해도 오래전부터 제기됐다. 확실한 것은 이 사건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쓰였는가 하는 점이다.
이후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자고 건의했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 실각하자, 이번에는 동인이 서인 처벌을 논의하게 된다. 그런데 그 수위를 두고 동인이 둘로 갈라졌다.
결과
강경파를 북인, 온건파를 남인이라 불렀다. 우성전의 집이 남산 아래에, 이산해의 집이 북악 아래에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3년 뒤 임진왜란이 터졌다. 남인 유성룡은 영의정으로 전쟁을 총괄하며 훈련도감을 세우고 이순신을 천거했다. 북인은 정인홍 등이 의병을 일으켜 현장에서 싸웠다. 전쟁이 끝난 뒤 주화를 논한 책임 등으로 유성룡이 물러나면서, 광해군을 지지한 북인이 정국을 잡는다.
나였다면
나였다면 어느 쪽에 섰겠는가.
대규모 정치 보복이 벌어진 직후다. 한쪽은 철저히 청산해야 재발을 막는다고 말하고, 다른 쪽은 청산이 또 다른 보복이 되어 끝없이 이어진다고 말한다. 게다가 바깥에서는 전쟁의 기운이 다가오고 있다.
원칙을 세울 것인가, 국면을 관리할 것인가. 이 질문에 정답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늘의 거울
과거의 국가폭력을 어디까지 청산할 것인가는 오늘날에도 반복되는 질문이다. 진상규명과 처벌의 범위, 그것이 정치보복인지 정의의 실현인지를 두고 매번 같은 형태의 대립이 벌어진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기축옥사가 진실 규명 없이 정치적으로 처리됐다는 점이다. 정여립이 무엇을 하려 했는지 오늘까지 확정되지 않은 채 천 명이 죽었다. 사실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처벌이 먼저 이뤄지면, 그 처벌의 정당성도 영원히 확정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