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5년, 사림이 조정을 장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기들끼리 갈라졌다. 발단은 이조전랑이라는 자리였다.
이조전랑은 정5품에 불과한 중간 관리였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두 가지 특권이 붙어 있었다. 삼사의 언관을 추천하는 권한, 그리고 후임자를 스스로 지명하는 자천권이었다. 언론기관의 인사를 사실상 좌우하면서 그 권한이 대신들의 손을 타지 않는 구조였다. 정승도 함부로 못 건드리는 자리였다.
이 자리를 두고 김효원과 심의겸이 부딪쳤다. 김효원은 젊은 사림의 신망을 받았으나 과거 권신 윤원형의 집에 드나든 전력이 문제가 됐다. 심의겸은 명종 비의 동생인 외척이었으나 사림을 보호한 공이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결격을 물고 늘어졌다.
김효원의 집이 한양 동쪽 건천동에 있어 그를 지지하는 쪽을 동인, 심의겸의 집이 서쪽 정동에 있어 그쪽을 서인이라 불렀다. 이름의 유래가 이토록 사소하다.
결과
조정은 두 사람을 모두 외직으로 내보내 무마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이이가 중재를 시도하며 조제보합을 주장했지만 양쪽 모두에게서 신뢰를 잃었고, 결국 서인으로 몰렸다. 그가 죽은 뒤 갈등은 더 빠르게 굳어졌다.
주목할 것은 이 분열이 단순한 감정싸움으로 끝나지 않고 학맥과 지역으로 재편됐다는 점이다. 동인은 이황과 조식의 학통을 이어 영남에, 서인은 이이와 성혼의 학통을 이어 기호에 뿌리를 내렸다. 이때 만들어진 이 지도가 이후 3백 년간 거의 바뀌지 않는다.
나였다면
나였다면 어느 쪽에 섰겠는가.
한쪽은 말한다. 위험한 자리에는 위험한 배경을 가진 사람을 앉히지 말라. 개인이 아무리 훌륭해도 구조가 문제다. 다른 쪽은 말한다. 사람을 배경으로 미리 배제하면 그 기준은 결국 정적을 치는 데 쓰인다. 행적으로 판단하라.
두 주장 모두 일리가 있고, 두 주장 모두 상대를 제거하는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렇게 됐다.
오늘의 거울
이 다툼의 핵심은 인사권이었다. 누가 사람을 뽑는 자리를 쥐느냐. 이조전랑의 자천권은 견제받지 않는 인사권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주는 조선의 실험이었고, 영조와 정조는 훗날 이 권한을 축소하는 데 공을 들이게 된다.
오늘날에도 인사권과 그 인사를 감시하는 기관의 인사권이 어디에 있느냐는 여전히 정치의 핵심 쟁점이다. 자리의 이름만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