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젤의 사흘 — 유럽의 증오가 낳은 꿈

1897 8월 29일 · 스위스 바젤

이 이야기는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유럽에서 시작된다. 19세기 말 유럽의 유대인들은 법적으로는 해방되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이방인이었다. 1881년 러시아에서 황제 암살의 책임이 유대인에게 씌워지며 대규모 포그롬(집단 학살·약탈)이 일어났고, 수십만 명이 서쪽으로, 그리고 일부는 오스만 제국령 팔레스타인으로 떠났다. 1894년 프랑스에서는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가 조작된 간첩 혐의로 유죄를 받았다. 계몽의 본고장 파리에서 "유대인에게 죽음을"이라는 군중의 외침을 취재하던 오스트리아 기자 테오도어 헤르츨은 결론에 도달한다 — 동화(同化)는 답이 아니다. 유대인에게는 자신의 국가가 필요하다.

1896년 헤르츨은 『유대국가』를 출간했고, 이듬해 8월 스위스 바젤에서 제1차 시온주의자 대회를 소집했다. 사흘간의 회의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을 위한, 공법(公法)으로 보장되는 고향(Heimstätte)을 수립한다"는 강령을 채택했다. 헤르츨은 일기에 적었다 — 바젤에서 나는 유대 국가를 세웠다. 오늘 이 말을 하면 웃음거리가 되겠지만, 50년 안에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실제로 50년 뒤인 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표결한다.

그런데 그 땅에는 이미 사람이 살고 있었다. 19세기 말 오스만령 팔레스타인의 인구는 약 50만이었고, 절대다수는 수백 년 그 땅에서 농사짓고 장사하며 살아온 아랍인이었다. 유대인은 예루살렘 등지의 오랜 공동체를 합쳐 인구의 한 자릿수 비율이었다. 초기 시온주의 일부에서 쓰인 "땅 없는 민족에게 민족 없는 땅을"이라는 구호는, 뒤의 절반이 사실이 아니었다. 이 어긋남을 일찍 알아본 사람들도 있었다 — 시온주의 사상가 아하드 하암은 1891년 팔레스타인을 다녀온 뒤 "우리는 그 땅이 비어 있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지만, 실제로는 경작 가능한 땅 어디에나 사람이 살고 있다"고 경고했다.

짚어둘 것이 있다. 시온주의는 침략의 이념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유럽이 유대인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절망에서 태어났다 — 그리고 반세기 뒤 홀로코스트는 그 절망이 과장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동시에, 그 절박한 꿈이 향한 땅에 이미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아무도 의견을 묻지 않았다 — 이 또한 사실이다. 서로를 지우지 않는 이 두 문장을 나란히 놓는 것이, 이후 100년을 이해하는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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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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