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과 악수 — 인티파다에서 오슬로까지

1993 9월 13일 · 가자 자발리아 · 미국 워싱턴

점령 20년째인 1987년 12월, 가자의 자발리아 난민촌에서 이스라엘 군용 트럭이 팔레스타인 노동자 4명을 치어 숨지게 한 사건을 계기로 봉기가 터져 나왔다. 1차 인티파다(intifada, "떨쳐 일어남")였다. 특징은 그 주체와 방식이었다 — 망명지의 PLO가 아니라 점령지 안의 보통 사람들이, 총이 아니라 돌과 파업과 납세 거부로 일어선 것이다. 탱크에 돌을 던지는 소년의 사진은 다윗과 골리앗의 자리를 뒤바꾸며 세계 여론을 움직였다. 봉기 진압 과정에서 6년간 팔레스타인인 1천 명 이상, 이스라엘인 200명 이상이 사망했다(양측 인권단체 집계). 같은 시기 가자에서 무슬림형제단 계열의 하마스가 창설되어, 세속 민족주의 PLO와는 다른 이슬람주의 저항 노선이 등장했다.

인티파다는 양쪽 모두에게 "이대로는 안 된다"를 확인시켰고, 냉전 종식과 걸프전이 판을 흔든 끝에 비밀 협상이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렸다. 1993년 9월 13일 백악관 잔디밭,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아라파트 PLO 의장이 클린턴 대통령 앞에서 악수했다. 오슬로 협정(원칙선언)의 골자는 상호 인정 — PLO는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이스라엘은 PLO를 팔레스타인의 대표로 인정한다 — 과 단계적 자치였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가 세워지고 아라파트가 튀니스에서 돌아왔다. 다만 협정은 가장 어려운 문제들 — 예루살렘, 난민 귀환, 정착촌, 최종 국경 — 을 모두 5년 뒤의 "최종지위협상"으로 미뤄 두었다. 희망의 설계이자, 뇌관을 품은 설계였다.

뇌관은 안쪽에서 먼저 터졌다. 양쪽 모두에서 협정에 반대하는 세력이 폭력으로 과정을 흔들었다 — 1994년 이스라엘 정착민 골드스타인이 헤브론의 모스크에서 예배 중이던 팔레스타인인 29명을 학살했고, 하마스의 버스 자폭 공격이 이스라엘 도시들을 덮쳤다. 그리고 1995년 11월 4일, 라빈 총리가 텔아비브의 평화 집회장에서 오슬로에 반대하는 이스라엘 극우 청년의 총에 암살되었다. 협상을 지탱하던 신뢰는 무너져 갔고, 그 사이에도 정착민 수는 오슬로 이후 오히려 배로 늘었다 — 팔레스타인 쪽에서 "협상은 점령의 관리 수단일 뿐"이라는 냉소가 자라난 배경이다.

2000년 7월 캠프데이비드에서 최종지위협상이 시도되었으나 예루살렘과 난민 문제에서 결렬되었다. 결렬의 책임을 두고 "아라파트가 역사적 제안을 걷어찼다"는 미국·이스라엘 측 서사와 "제안은 주권국가라 부를 수 없는 조각난 땅이었다"는 팔레스타인 측 반론이 지금까지 맞선다. 두 달 뒤 샤론 리쿠드 당수가 경찰 수백 명을 대동하고 성전산(알아크사 경내)을 방문한 것을 도화선으로 2차 인티파다가 폭발했다 — 1차와 달리 자폭 공격과 군사 진압이 맞부딪힌 5년간 팔레스타인인 3천여 명, 이스라엘인 1천여 명이 사망했고(B'Tselem 집계), 오슬로가 열어 놓았던 문은 사실상 닫혔다. 이 시기 이스라엘이 서안에 세우기 시작한 분리장벽은, 이스라엘에는 자폭 공격을 막은 보안 시설로, 팔레스타인에는 그린라인을 넘어 땅을 잠식한 "분리의 벽"으로 — 지금도 하나의 구조물에 두 개의 이름으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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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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