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임통치 30년 — 두 민족, 하나의 감옥

1936 4월 · 팔레스타인 예루살렘 · 야파

전쟁이 끝나자 약속들의 청구서가 돌아왔다. 1920년 산레모 회의에서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고, 1922년 국제연맹이 이를 승인하면서 밸푸어 선언의 문구가 위임통치 규약 안에 그대로 들어갔다. "위임통치"란 국제연맹 규약의 표현으로는 "아직 스스로 서기 어려운 민족"을 선진국이 후견한다는 제도였다 — 식민지배에 문명의 옷을 입힌 이 제도 아래서, 팔레스타인은 두 민족의 상반된 기대를 실은 채 30년을 흘러간다. 같은 시기 일본이 조선 지배를 "문명화"로 정당화했던 것을 떠올리면, 이 수사(修辭)의 구조는 낯설지 않다.

유대인 이민은 꾸준히, 그리고 1933년 나치가 독일에서 집권한 뒤에는 급격히 늘었다. 1922년 약 8만이던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인구는 1930년대 말 45만에 이르러 전체 인구의 3분의 1 가까이 되었다. 키부츠와 도시가 세워지고 토지 매입이 확대되면서, 그 땅을 소작하던 아랍 농민들이 밀려나는 일이 늘었다. 긴장은 폭력으로 터졌다. 1929년 통곡의 벽 예배 문제로 촉발된 폭동에서 아랍인들이 헤브론과 사페드의 유대인 공동체를 습격해 130여 명이 살해되었고, 영국 경찰의 진압과 보복 속에 아랍인도 비슷한 수가 목숨을 잃었다.

1936년 아랍 사회는 총파업으로 시작해 3년에 걸친 대반란을 일으켰다 — 유대인 이민 중단과 독립을 요구하는, 팔레스타인 아랍 민족운동의 정점이었다. 영국은 계엄과 마을 파괴, 지도부 처형과 추방으로 반란을 진압했다. 아랍인 사망자는 5천 명 안팎으로 추산되며, 팔레스타인 아랍 사회는 지도부와 무장 역량을 사실상 상실한 채 다음 10년을 맞게 된다 — 1948년의 결과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반란 중 영국의 필 위원회(1937)가 처음으로 "두 민족의 요구는 양립 불가능하다"며 분할안을 제시했으나 무산되었다.

그리고 1939년, 영국은 백서를 내 유대인 이민을 향후 5년간 7만 5천 명으로 제한하고 이후는 아랍 측 동의에 맡긴다고 발표했다 — 아랍 반란을 달래고 다가오는 세계대전에서 아랍의 이탈을 막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시점이었다. 유럽의 유대인들에게 탈출로가 가장 절실하던 바로 그 시기에 문이 닫힌 것이다. 홀로코스트로 유럽 유대인 600만 명이 살해되는 동안 팔레스타인의 문은 백서의 쿼터로 잠겨 있었고, 이 기억은 전후 시온주의 운동에 "국가 없이는 생존도 없다"는 확신을 새겼다. 두 민족 모두에게 위임통치 30년은, 영국이라는 하나의 간수가 지키는 감옥에서 서로를 적으로 확인해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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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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