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5~1917년, 영국은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같은 땅을 두고 서로 어긋나는 약속을 겹쳐 쌓았다. 첫째, 1915~16년 이집트 주재 고등판무관 맥마흔은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과 서한을 주고받으며, 아랍인이 오스만에 맞서 봉기하면 전후 아랍 독립국가를 지지하겠다고 약속했다(후세인-맥마흔 서한). 팔레스타인이 그 독립국가에 포함되는지를 두고 영국과 아랍 측의 해석은 이후 내내 갈렸다. 둘째, 1916년 영국과 프랑스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오스만령 중동을 두 나라의 세력권으로 비밀리에 분할했다 — 아랍 독립 약속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내용이었고, 1917년 러시아 혁명정부가 이 비밀협정을 폭로하면서 아랍 세계는 배신을 알게 된다.
셋째가 1917년 11월 2일의 밸푸어 선언이다. 영국 외무장관 밸푸어가 유대계 지도자 로스차일드 경에게 보낸 130단어의 편지에서,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을 위한 민족적 고향(national home)을 수립하는 것을 호의적으로 보며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밝혔다. 편지에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 "팔레스타인에 현존하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종교적 권리를 침해하는 어떤 일도 행해져서는 안 된다." 당시 그 "비유대인 공동체"는 팔레스타인 인구의 약 90%였다. 인구의 9할을 "비유대인"이라는 부정형으로만 지칭한 이 문서에서, 그들의 정치적 권리 — 자기 땅의 장래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 — 는 언급되지 않았다.
영국이 왜 이 선언을 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겹친다. 전쟁 수행을 위해 미국과 러시아의 유대인 여론을 끌어들이려 했다는 설명, 수에즈 운하 방어를 위해 팔레스타인에 친영 세력을 심으려 했다는 전략적 설명, 그리고 밸푸어와 로이드 조지 등 당대 정치인들의 종교적·문화적 신념이 작용했다는 설명이다. 확실한 것은, 이 편지가 그 땅에 살던 사람들과의 어떤 협의도 없이 쓰였다는 사실이다. 훗날 밸푸어 자신이 내부 문서에 남긴 말은 이 태도를 요약한다 — 시온주의는 "그 오래된 땅에 지금 살고 있는 70만 아랍인의 욕망과 편견보다 훨씬 중요하다."
한국 독자라면 이 대목에서 기시감을 느낄 것이다. 같은 시기 열강은 카쓰라-태프트 밀약(1905)으로 조선과 필리핀을 맞바꾸듯 승인했고, 전후 처리에서 당사자의 자리는 없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이 갔으나 발언권을 얻지 못했던 것처럼,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항의 사절단도 런던에서 빈손으로 돌아왔다. 강대국이 당사자 없이 그은 선이 그 후 100년의 운명이 되는 구조 — 이 시리즈에서 여러 번 반복될 패턴이 여기서 처음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