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 국립묘지법은 내란·반란 관련 범죄로 금고 1년 이상의 실형이 "확정"된 사람의 안장을 제한한다. 이 한 단어, "확정"이 12·12 관련자들의 운명을 갈랐다. 국방부 군수차관보로 반란 모의 초기부터 가담해 반란 성공 후 제3야전군사령관으로 영전했던 유학성은, 1996년 1심과 2심에서 모두 유죄(징역 6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대법원 상고심이 진행되던 1997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한국 형사소송법상 피고인이 사망하면 공소기각으로 재판이 종결되고, 확정판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한다는 원칙이 적용된다. 그 결과 유학성은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002호 — 가장 상석에 해당하는 자리 — 에 안장됐다. 전두환이 생전 이 묘소를 꾸준히 참배했다는 것도 알려진 사실이다. 20사단장으로 반란에 가담했던 박준병은 조금 다른 경로를 거쳤다. 1996년 내란수괴 재판에서 그는 "직접적인 가담 의도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5월단체는 그를 전두환·정호용·노태우·이희성과 함께 "5·18 오적"으로 꼽지만, 법적으로는 무죄였기에 안장 제한 사유에 해당하지 않았고, 사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반면 1군단장으로 정승화 연행 작전에 가담했던 황영시와, 수도군단장으로 병력을 동원했던 차규헌은 1997년 대법원에서 반란·내란 유죄가 최종 확정됐다. 이들은 확정판결 "이후"에 사망했다 — 그래서 국립묘지법상 안장 제한 대상이 됐고, 국립묘지에 묻히지 않았다. 네 사람 모두 같은 반란에, 같은 법정에 섰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유학성과 박준병은 국립묘지에, 황영시와 차규헌은 그러지 못했다. 죄의 무겁고 가벼움이 아니라, 확정판결과 사망 중 무엇이 먼저 왔는가라는 우연이 그 경계를 갈랐다. 이것이 이 시리즈가 반복해서 짚는 현행법의 구조적 허점이다.
안장을 가른 한 가지 우연 — 확정판결과 사망, 무엇이 먼저였나
출처
- [언론보도] 12·3 비상계엄 가담자도 현충원 묻히나…국립묘지법 허점
- [기록보존소] 유학성·박준병 관련 대법원 판결 및 언론 보도 종합
이 글은 현충원의 역설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