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룡 — "순직 처리"라는 열쇠로 열린 국립묘지의 문

1998 2월 · 대전(국립대전현충원)

일본 관동군 헌병으로 군 경력을 시작한 김창룡은 항일세력에 대한 첩보 활동으로 일제 치하에서 승승장구했다. 광복 후에는 특무부대장(오늘날의 군사안보지원사령부 전신)을 지내며 좌익 색출 공작을 주도했고, 백범 김구 암살의 배후라는 의혹을 오랫동안 받아왔다 — 이 의혹은 정황 증거들이 거론되지만 법적으로 명확히 규명되지는 않은 채로 남아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둔다. 1998년 2월, 경기 안산의 개인 묘지에 있던 그의 묘를 국립대전현충원 장군묘역으로 이장해달라는 유족의 요청을 국방부가 승인했다. 옛 동료들과 군 장병들이 참석하는 안장식이 열렸고 예포까지 발사됐다. 논란이 일자 육군은 "순직으로 처리돼 있어 안장에 결격 사유가 없다"고 해명했고, 이장을 지원한 국군기무사령부는 "암살 배후 의혹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니 매도해선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창룡은 2009년 정부의 "12명 공식 결정" 명단에는 포함돼 있지 않다. 다만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된 인물이다 — 정부의 공식 판단과 민간 연구기관의 판단이 갈리는 사례라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12명 vs 63명"이라는 두 숫자의 간극이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들로 채워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은 지금도 매년 현충일마다 시민단체의 항의 방문이 이어지는 장소다.

출처

이 글은 현충원의 역설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지도에서 관련 지역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