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민족의 역사인가, 문명의 서사인가

2026 · —

열다섯 편을 지나 마지막 질문 앞에 섰다. 그런데 이 시리즈가 마지막으로 던지고 싶은 질문은 "그래서 진짜인가 가짜인가"가 아니다. 그보다 한 층 아래에 있는 질문 — 설령 이 모든 기록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누구의 역사인가 — 이다. 낯선 질문일 수 있으니 차근히 가자. 우리가 당연하게 쓰는 '민족'과 '국사(國史)'라는 틀은 생각보다 젊다. 혈통과 언어와 역사를 공유하는 단일한 공동체로서의 민족, 그 민족을 단위로 과거를 소유하는 역사 서술 — 이것은 19세기 유럽에서 국민국가와 함께 발명되어 전 세계로 수출된 근대의 인식 틀이다. 동아시아에서 '민족'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 시기의 번역어다. 20세기 초의 지식인들이 단군을 국조로 세우고 만주를 '우리 강역'으로 그린 것은 이 근대적 틀로 과거를 재조직하는 작업이었고 — 나라를 빼앗긴 시대에 그것은 절박하고 정당한 저항의 무기였다. 15편에서 본 그대로다. 그러나 무기로서의 정당성과 인식으로서의 정확성은 별개다. 기원전 72세기의 파미르에도, 기원전 27세기의 탁록에도, '한국인'과 '중국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민족이라는 그릇 자체가 없던 시대의 사람들을 근대의 그릇에 소급해 담는 순간, 우리는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려 드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 소유 다툼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는 치우천왕의 사례가 이미 보여주었다 — 한국의 재야가 "우리 조상"이라 부르는 그 인물을, 중국은 중화삼조당에 모셔 "중화민족의 시조"로 등기했다. 같은 오류의 거울상이다. 동북공정이 고구려를 "중국 지방정권"으로 소급 편입하는 것이 폭력이라면, 그 폭력의 문법 — 고대를 근대 민족의 등기부에 올리는 문법 — 자체를 의심해야 한다. 상대의 왜곡에 같은 문법의 더 큰 주장으로 맞서는 것은 전선을 넓힐 뿐이다. 그래서 이 시리즈는 세 번째 길을 제안한다. 환단고기가 그리는 세계 — 파미르와 바이칼에서 발원해 만주와 중원과 한반도로, 어쩌면 메소포타미아까지 갈라져 흐른 사람들의 이동과 문명의 서사 — 를, '우리 것'의 등기부에서 꺼내 동아시아 문명 전체의 이야기로 읽는 것이다. 이렇게 읽으면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위서 논쟁의 상당 부분이 힘을 잃는 것이다. 이 책을 둘러싼 싸움이 그토록 격렬했던 것은 양쪽 모두 이것을 민족의 소유권 문서로 읽었기 때문이다 — 진서라면 우리 민족의 위대함이 증명되고, 위서라면 국수주의의 날조가 되는 구도. 그러나 소유권 문서가 아니라 문명의 서사시로 읽는 순간, 이 책은 일리아스나 구약성서와 같은 자리에 놓인다. 일리아스를 읽는 데 트로이 전쟁의 실증이 전제 조건이 아니듯, 그리고 슐리만이 시(詩)를 단서 삼아 실제 트로이를 팠듯이 — 서사로 읽는 것과 학문적으로 검증하는 것은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다. 이것은 이 서사가 우리에게 각별하다는 사실과 모순되지 않는다. 이 서사를 지키려고 목숨을 건 것도, 이 서사에서 싸울 힘을 길어 올린 것도 이 땅의 사람들이었다 — 그 근현대사의 인연은 온전히 우리의 역사다. 고대의 서사는 인류의 것으로 열어두고, 그 서사와 함께 살아온 근현대의 기억은 우리의 것으로 간직하는 것. 그 둘을 구분할 줄 아는 성숙함이야말로, 역사를 빼앗겨본 나라가 역사를 대하는 가장 품위 있는 방식이 아닐까. 환단고기는 말한다 — 나라는 형체요 역사는 혼이라고. 그 문장을 이렇게 돌려주며 시리즈를 닫는다. 혼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가는 첫걸음은, 믿기 전에, 배척하기 전에 — 읽는 것이다.

출처

이 글은 환단고기, 무엇을 말하는가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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