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실제로 한 일 — 대종교, 그리고 청산리로 간 청년들

1920 10월 · 만주 청산리

여기서부터는 진위 논쟁이 필요 없는 이야기다. 환단고기가 담고 있는 서사 — 환인·환웅·단군으로 이어지는 국통, 나라는 망해도 혼은 죽지 않는다는 사관 — 가 20세기 초의 실제 역사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믿음이 아니라 기록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1909년, 을사늑약 규탄 상소와 매국노 처단 시도로 옥고를 치렀던 나철이 서울에서 단군교를 중광(重光 — 다시 밝힘)한다. 이듬해 대종교(大倧敎)로 이름을 바꾼 이 종교는 단군을 신앙의 중심에 놓았고, 태백일사에 실린 것과 같은 계통의 삼일신고·천부경을 경전으로 삼았다. 경술국치 후 대종교는 총본사를 만주로 옮긴다 — 포교의 자유를 찾아서이기도 했지만, 그곳이 옛 조선과 부여와 고구려의 땅, 즉 이 서사가 가리키는 국통의 무대였기 때문이다. 일제가 1915년 종교통제령으로 대종교를 사실상 불법화한 뒤, 나철은 1916년 구월산 삼성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항의했다. 그리고 대종교는 총을 들었다. 2대 교주 김교헌은 「신단실기」·「신단민사」를 지어 단군 중심의 역사관을 체계화했고, 그 문하에서 만주 무장투쟁의 핵심 조직이 자라났다. 북로군정서 — 1920년 청산리 대첩의 주력 부대 — 의 총재 서일은 대종교의 최고 교직에 있던 인물이며, 북로군정서 자체가 대종교 교단(중광단→정의단)을 모태로 성장한 조직이다. 김좌진이 그 군대의 사령관이었다. 청산리로 간 청년들의 상당수가 대종교 신자였고, 그들이 부르던 노래 가운데 단군세기가 2세 단군 부루의 작으로 기록한 어아가를 되살린 의식가가 있었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신흥무관학교의 설립 주역들(이회영 형제, 이상룡 등),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에 이르기까지 — 박은식(임시정부 2대 대통령, 「한국통사」·「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저자), 신채호(「조선상고사」), 김구, 이시영 — 대종교와 단군 민족주의의 자장은 독립운동 지도부에 넓고 깊게 드리워 있었다. 박은식이 "나라는 형(形)이요 역사는 신(神)"이라는 국혼(國魂) 사관을 편 것은 단군세기 서문의 "국유형 사유혼"과 정확히 같은 구조의 사상이다. 정확성을 위해 선을 그어둘 것이 둘 있다. 첫째, 이 지도자들이 '환단고기라는 책'을 읽었다는 증거는 없다 —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는 환단고기를 인용하지 않으며, 두 텍스트는 계통이 다르다. 그들을 움직인 것은 환단고기 그 자체가 아니라, 환단고기가 속해 있는 더 큰 흐름 — 단군을 국조로 세우고 만주를 우리 역사의 무대로 되찾는 민족주의 사학과 대종교 신앙 — 이었다. 둘째,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위서론자와 옹호론자가 이 대목에서는 기묘하게 만난다. 위서론의 관점에서 환단고기는 이 흐름이 낳은 산물이고, 옹호론의 관점에서는 이 흐름이 지켜낸 유산이다. 어느 쪽이든 — 이 서사와 독립운동의 결합 자체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다. 일제가 이 결합을 얼마나 위협적으로 여겼는지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대에 대대적인 서적 압수·금서 정책을 시행했고(단군 관련서·역사서가 다수 포함됐다), 조선사편수회를 세워 한국사의 상한과 강역을 축소하는 「조선사」 편찬을 밀어붙였다 — 이 이야기는 본 자료실의 「역사왜곡에 맞서다」 시리즈 1편에서 다룬 그대로다. 단군을 신화의 영역으로 밀어 넣는 작업과, 단군을 역사의 영역으로 끌어오려는 저항 — 20세기 전반의 역사 전쟁은 이 두 힘의 충돌이었고, 환단고기 논쟁은 그 전쟁의 가장 오래 남은 전선인 셈이다. 1942년, 일제는 임오교변으로 대종교 지도부를 일제 검거해 고문했고 교주 윤세복 이하 다수가 옥사했다. 광복 후 대한민국이 개천절을 국경일로, 홍익인간을 교육법의 교육이념으로 새긴 것은 — 이 피의 계보에 대한 국가적 응답이었다. 환단고기가 위서인가 진서인가와 무관하게, 이 책이 담은 서사는 이미 대한민국의 제도 속에 살아 있다.

출처

관련 콘텐츠

이 글은 환단고기, 무엇을 말하는가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지도에서 관련 지역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