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여기 — 해모수에서 주몽까지, 교과서가 건너뛴 180년

-239 · 웅심산 (기록상 기병지)

우리 역사 교과서에는 이상한 공백이 있다. 고조선이 망했다(기원전 108년, 위만조선 멸망). 그리고 고구려가 섰다(기원전 37년). 그 사이는? 부여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몇 줄, 한사군이 설치됐다는 몇 줄이 전부다. 북부여기는 바로 그 끊어진 허리를 잇겠다는 책이다. 저자로 전해지는 인물은 고려 말의 학자 복애 범장 —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거론되는 실존 논의가 있는 인물이다(범장과 이 텍스트의 연결 역시, 이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논쟁 대상이다). 이야기는 기원전 239년에 시작된다. 서쪽에서는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었고 북방 초원에서는 흉노가 팽창하던, 힘없는 나라는 지도에서 지워지던 시대다. 오가 공화정으로 표류하던 옛 조선 땅에서 해모수(解慕漱)가 웅심산에서 군사를 일으킨다. 삼국유사가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오룡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신화적으로 압축한 그 인물을, 북부여기는 정치가로 그린다 — 재야의 상징 해석은 오룡거의 다섯 용을 오가(五加), 즉 다섯 부족 수장의 추대로 읽는다. 내전이 아니라 정치적 통합으로 정권을 세웠다는 뜻이 된다. 해모수는 기원전 232년 오가 체제를 접수해 나라 이름을 북부여라 하고, 스스로를 단군이라 칭해 조선의 정통 계승을 선언했다고 기록된다. 이후의 연대기는 국가 운영의 기록이다. 2세 모수리는 서울과 지방에 관리를 나누어 파견하는 경향분수(京鄕分守)의 법을 세웠다 — 부족연맹을 중앙집권 관료제로 바꾸는 개혁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4세 고우루 대에는 한무제의 동방 침공이 온다. 기원전 108년 한이 위만조선의 왕검성을 무너뜨린 것은 사서로 확인되는 사실인데, 북부여기는 그 뒤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 한의 군대가 북부여 방면으로 밀고 들어왔으나 이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의병장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동명(東明)이라 칭하며 일어나 한나라 세력을 격퇴하고, 민심을 얻어 수도로 진격하자 당시 왕 해부루가 국상 아란불의 진언에 따라 동쪽 가섭원으로 옮겨갔다고 이어진다 — 우리가 아는 동부여의 탄생이 사실은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세력의 이주였다는 서술이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도 아란불의 꿈과 가섭원 천도 이야기는 있지만, 그 배경에 고두막한이라는 인물이 있었다는 것은 북부여기만의 기록이다. 「논형」·「위략」 등 중국 문헌에 전하는 부여 시조 동명 설화(탁리국 출신의 동명이 남쪽으로 와 부여를 세웠다는)가 주몽 설화와 별개로 존재한다는 점은 사실인데, 북부여기는 그 '원조 동명'의 자리에 고두막한을 놓는 셈이다. 마무리는 계승의 드라마다. 고두막한의 아들 고무서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동부여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해온 청년 — 해모수의 혈통으로 기록된 주몽 — 을 둘째 딸 소서노와 맺어주고 대통을 물려주었다는 것이다. 기원전 58년의 일로 기록된다. 그리고 주몽은 기원전 37년 나라 이름을 고구려로 선포한다. 창업이 아니라 계승 — 북부여기의 관점에서 고구려 건국은 새 나라의 탄생이 아니라 조선-부여 국통의 리모델링이다. 이 대목에서 환단고기 바깥의 돌 하나를 놓고 가자. 광개토대왕릉비 — 414년에 고구려인들이 직접 세운 그 비석의 첫머리는 "시조 추모왕(주몽)은 북부여에서 나셨다(出自北夫餘)"로 시작한다.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금석문의 사실이다. 5세기의 고구려인들에게 북부여는 전설이 아니라 자신들의 출신지로 새길 만큼 실재하는 이름이었다. 북부여기가 그리는 180년의 디테일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북부여라는 이름의 공백을 무언가가 메우고 있었다"는 것만큼은 비석이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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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환단고기, 무엇을 말하는가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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