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세기 (3) — 대부여로의 개칭, 옥새를 내려놓은 마지막 단군, 그리고 6년의 공화정

-238 · 장당경 아사달 (기록상 도읍)

2천 년 왕조의 후반부를 단군세기는 쇠퇴의 연대기로 기록한다. 서쪽에서는 전국시대의 강자 연(燕)나라가 국경을 압박했다. 연의 장수 진개가 침입해 서쪽 땅을 크게 잃었다는 패배의 기록도 그대로 실려 있다 — 자국의 패배를 감추지 않고 적었다는 점은 이 책을 읽을 때 눈여겨볼 대목이다(옹호론은 이를 사서로서의 진정성 논거로 들고, 위서론은 연 진개의 침입이 「위략」 등 중국 사서에 이미 있는 내용이라 얼마든지 반영 가능했다고 본다). 기자(箕子) 문제에 대한 기록도 통설과 다르다 — 은나라가 망한 뒤 기자가 망명해오자 단군이 그를 왕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서쪽 변방의 한 지역을 다스리는 제후로 수용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기자가 와서 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이른바 기자동래설을 정면으로 뒤집는 서술이다. 기원전 425년, 44세 단군 구물은 반란을 진압하고 즉위하면서 대개혁을 단행한다. 도읍을 장당경으로 옮기고 국호를 조선에서 대부여(大夫餘)로 바꾸었으며, 삼한관경제를 삼조선(三朝鮮) 체제로 개편해 지방에 병권까지 대폭 이양했다고 기록된다. 이 국호 개칭 기록은 한국 고대사의 오랜 수수께끼 하나에 이 책이 내놓는 답이기도 하다 — 부여는 고조선이 망한 뒤 갑자기 등장한 나라가 아니라 고조선 자신의 후기 국호였으며, 그래서 고구려와 백제가 한결같이 부여의 계승을 자처했다는 것이다. 다만 분권 개혁의 결과로 지방 세력이 비대해져 중앙의 통제가 무너져갔다고 책은 이어간다. 그리고 기원전 238년, 마지막 47세 단군 고열가의 퇴장이 온다. 제후들은 명을 듣지 않고 국고는 비었다. 고열가는 "천명이 다했다"며 스스로 옥새를 내려놓고 산으로 들어갔다 — 왕이 사직서를 내고 잠적한 셈이다. 지도자가 사라진 나라는 그러나 곧장 무너지지 않았다. 다섯 부족의 수장들, 곧 오가(五加)가 모여 6년간 합의로 국정을 운영했다고 단군세기는 기록한다. 후대의 해석은 이를 '오가 공화정'이라 부른다 — 기록을 따르자면 로마 공화정과 시기가 겹치는 동방의 합의제 실험이다. 왕 없이 시스템으로 굴러간 6년. 그러나 구심점 없는 체제는 오래갈 수 없었고, 백성들은 새로운 영웅을 기다렸다. 이 대목에서 단군세기는 붓을 놓지만, 끝맺음의 방식이 의미심장하다. 멸망이 아니라 계승의 예고로 끝나는 것이다. 웅심산에서 일어난 해모수가 오가 공화정을 접수하고 북부여를 열어 단군조선의 정통을 이었다는 것 — 나라의 형체는 바뀌어도 혼(국통)은 이어진다는 서문의 선언("국유형 사유혼")이 본문의 구조로 구현된 셈이다. 조선 → 대부여 → 북부여 → (훗날) 고구려로 이어지는 이 국통맥(國統脈)의 사관이야말로 환단고기 전체를 관통하는 척추이고, 20세기 초 나라를 잃은 세대가 이 책 계통의 서사에서 길어 올린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 형체(국토)는 빼앗겼지만 혼(역사)이 살아 있는 한 나라는 죽지 않았다는 논리. 그 이야기는 15편에서 만난다. 다음 편은 끊어진 허리, 북부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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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환단고기, 무엇을 말하는가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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