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는 10년 전쟁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루지 않는다. 놀랍게도 전쟁 9년째의 며칠, 그것도 한 영웅의 "분노"에 초점을 맞춘다. 서사시의 첫 단어부터가 "분노"다.
그리스 최고의 전사 아킬레우스는 총사령관 아가멤논과 전리품(한 여인)을 두고 다투다 모욕을 당하자, 분노해서 전투를 거부하고 막사에 틀어박힌다. 최강의 전사가 빠지자 그리스군은 밀리기 시작한다. 보다 못한 아킬레우스의 절친 파트로클로스가 그의 갑옷을 빌려 입고 대신 싸우러 나갔다가 트로이 최고의 영웅 헥토르에게 죽는다. 친구의 죽음에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이제 아가멤논이 아니라 헥토르를 향한다. 그는 복수를 위해 다시 전장에 나서 헥토르를 죽이고, 그 시신을 전차에 매달아 끌고 다니며 모욕한다.
「일리아스」의 마지막은 전투 장면이 아니다. 헥토르의 늙은 아버지,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가 한밤중에 적진으로 홀로 찾아와 아들을 죽인 아킬레우스 앞에 무릎 꿇고 아들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이다. 아킬레우스는 그 노인에게서 고향의 자기 아버지를 보고, 함께 운다. 그리고 시신을 돌려준다. 3천 년 전의 이 서사시가 위대한 이유가 여기 있다 — 이야기의 끝에서 그리는 것은 승리가 아니라, 적을 인간으로 마주 보는 순간이다. 분노로 시작한 노래가 용서로 끝난다.
(그 유명한 "트로이 목마"와 트로이의 함락은 「일리아스」에 나오지 않는다. 서사시는 헥토르의 장례로 끝나고, 목마 이야기는 후대의 다른 작품들과 「오디세이아」의 회상 속에 전해진다.)
【그때 한반도는】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청동 창으로 겨루던 이 시기, 한반도에서는 미송리식 토기라 불리는 특징적인 민무늬 토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손잡이가 달린 이 토기의 분포 범위는 비파형동검과 겹쳐서, 학자들은 이것을 초기 고조선 문화권의 경계를 보여주는 유물로 본다. 영웅들의 이름이 노래로 전해지던 그리스와 달리, 한반도의 이 시대는 글이 아니라 토기와 청동기 같은 유물로만 말을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