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릉비 ⑧ 오늘의 비 — 유리벽 안의 돌, 그리고 우리 안의 과장

2002 · 중국 지린성 지안 태왕진

비는 지금도 그 자리에 서 있다. 다만 유리와 지붕에 둘러싸여 있고, 가까이 다가가거나 자유롭게 촬영하기 어렵다. 보호를 위한 조치이면서 동시에 관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2002년 중국사회과학원 산하 변강사지연구중심이 시작한 동북공정 이후, 고구려는 중국 동북 지방의 지방 정권이라는 서술이 공식화됐고, 이 비 역시 그 서사 안에 배치되었다. 2012년 지안에서 또 하나의 고구려비가 발견됐을 때, 중국 연구팀이 곧바로 비문의 표현이 중국 고대 비문의 전통과 이어진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니 이 비석은 세 번 읽혔다. 처음에는 일본 육군 참모본부가 읽었고, 다음에는 중국의 국가 프로젝트가 읽었으며, 그 사이에서 한국은 계속 반박하며 읽어왔다. 세 독법 모두 비문 바깥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반박에도 함정이 있다. 임나일본부설과 동북공정에 맞서는 과정에서, 국내에는 사료적 근거 없이 고대사를 부풀리는 유사역사학이 자라났다. 광개토대왕의 정복 범위를 실제 기록보다 크게 그리거나, 비문에 없는 내용을 있는 것처럼 말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침략의 논리에 맞서는 길은 과장이 아니라 실증이다. 이 비석이 그 점을 가장 잘 보여준다 — 신묘년 서른두 자를 부풀려 읽은 쪽이 틀렸다면, 다른 대목을 부풀려 읽는 것도 같은 방식으로 틀린다.

그리고 비문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나면 남는 인상은 조금 다르다. 이 비의 마지막 3분의 1은 정복이 아니라 무덤 지킬 집안의 명단이다. 매구여 백성 몇 집, 평양성 백성 몇 집, 새로 들어온 한과 예 몇 집. 왕은 옛 백성이 갈수록 고달파질 것을 염려했고, 수묘인을 사고파는 일을 법으로 금했다. 5세기 고구려가 자기 백성을 어떻게 편제하고 관리했는지를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기록이 여기 있다.

이 비석은 한일 고대사 논쟁을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다. 고구려가 자기 왕조를 위해, 자기 무덤을 지키기 위해 세운 기록이다. 그 사실을 되돌려놓는 것이 이 시리즈의 목적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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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광개토대왕릉비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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