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릉비 ⑤ 신묘년조 32자 — 한 문장을 둘러싼 140년
원문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破百殘□□新羅 以爲臣民
영락 5년(395) 기사와 영락 6년(396) 백제 정벌 기사 사이에 놓인 서른두 자. 전통적으로 여섯째 글자 이하를 도해파(渡海破)로 읽어왔으나, 동북아역사재단이 펴낸 원석탁본 연구(《혜정 소장본 광개토왕비 원석탁본》, 2014)는 해(海) 자리를 판독 불가로 본다. 여기서는 그 견해를 따라 □로 둔다. 이 대목은 신묘년(391)에 벌어진 개별 사건의 기록이라기보다, 영락 6년부터 14년까지 이어진 남진의 명분을 앞세워 요약한 문장으로 보는 것이 현재 다수설이다.
현대어로 읽기
백잔(백제)과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이어서 줄곧 조공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와서 □를 건너 백잔을 깨고 □□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 위 번역은 여러 독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 문장은 주어와 목적어가 확정되지 않아 정반대의 뜻으로도 읽힌다. 〈일본 관학의 독법〉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 1889년 참모본부 계열 해독이 이렇게 읽었고, 이는 일본서기의 신공황후 기사와 결합해 임나일본부설의 최대 물증으로 쓰였다. 〈정인보의 독법(1930년대 말)〉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를 고구려로 본다. 왜가 신묘년에 오자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왜를 깨뜨렸고, 백잔이 신라를 신민으로 삼으려 했다는 것이다. 박시형(1966)이 이 계열을 이었다. 〈김석형의 독법(1966)〉 임나일본부설을 전면 부정하고, 오히려 삼한·삼국계 이주민이 일본 열도에 분국을 세웠다는 분국설로 나아갔다. 〈이형구·김병기의 독법〉 글자 자체가 뒤에 손을 탄 것으로 본다. 이형구(1981)는 왜(倭)가 후(後)를, 내도해파(來渡海破)가 불공인파(不貢因破)를 고친 것이라 보았고, 김병기(《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2020)는 서예학의 관점에서 도해파 자리의 본래 글자를 입공우(入貢于)로 추정했다. 〈최근 연구〉 최연식(2020)은 백잔이 왜와 연결해 신라를 신민으로 삼으려 했다는 쪽으로 문장을 재구성했고, 여호규(2024)는 이 문장이 특정 사건의 기록이 아니라 정벌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 구성된 서술일 가능성을 정리했다. 확정된 것은 하나다. 이 비는 고구려가 세운 현창비이고, 이 문장은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영락 6년 백제 정벌의 명분을 세우는 자리에 놓여 있다. 서른두 자 가운데 넉 자가 읽히지 않는 문장 하나로 200년의 지배를 입증할 수는 없다.
출처
- [단행본] 혜정 소장본 광개토왕비 원석탁본
- [논문] 영락 6년 고구려의 백제 침공 원인에 대한 검토 — 광개토왕비 신묘년 기사의 재해석을 중심으로
- [논문] 광개토왕릉비 신묘년조의 연구동향과 그 성격
- [단행본]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이 글은 광개토대왕릉비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