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릉비 ④ 훈적기사 — 비려에서 동부여까지, 스물두 해의 원정
원문
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稗麗不□□人 躬率往討 過富山負山 至鹽水上 破其三部洛六七百營 牛馬群羊 不可稱數 於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城 力城 北豊 五備□ 遊觀土境 田獵而還 〔이 자리에 신묘년조 32자가 들어간다 — 5편에서 따로 읽는다〕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軍□□首攻取 寧八城 臼模盧城 各模盧城 幹氐利城 □□城 閣彌城 牟盧城 彌沙城 □舍蔦城 阿旦城 古利城 □利城 雜珍城 奧利城 勾牟城 古模耶羅城 頁□□□□城 □而耶羅城 瑑城 於利城 □□城 豆奴城 沸□□利城 彌鄒城 也利城 太山韓城 掃加城 敦拔城 □□□城 婁賣城 散那城 那旦城 細城 牟婁城 于婁城 蘇灰城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城 林城 □□□□□□□利城 就鄒城 □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彡穰城 曾□城 □□盧城 仇天城 □□□□□其國城 殘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歸穴□便圍城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王自誓 從今以後 永爲奴客 太王恩赦先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 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 八年戊戌 敎遣偏師 觀息愼土谷 因便抄得 莫□羅城 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 朝貢論事 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矜其忠誠 □遣使還告以□計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 □新羅城□城 倭寇大潰 城□ □□盡□□□ 安羅人戍兵 □□□□□□□□□□□□□□□□□□□□□□□□□□□□□□□□□□□□□□□□□□□□□□□□□□□□□□□□□□□□□□□□□□□□□□□□□□□□□□ 安羅人戍兵 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寐錦□□僕勾□□□□朝貢 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石城□連船□□□ 王躬率□□ 從平穰□□□鋒相遇 王幢要截盪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師□□合戰 斬煞蕩盡 所獲鎧鉀一萬餘領 軍資器械不可稱數 還破沙溝城 婁城 □住城 □城 □□□□□□城 卄年庚戌 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 軍到餘城 而餘□國駭□□□□□□□□□ 王恩普覆 於是旋還 又其慕化隨官來者 味仇婁鴨盧 卑斯麻鴨盧 椯社婁鴨盧 肅斯舍鴨盧 □□□鴨盧 凡所攻破 城六十四 村一千四百
제1면 7행부터 제3면 8행까지 이어지는 훈적기사 전문. 영락 5년(395)부터 20년(410)까지 여덟 개의 원정 기록이 연도순으로 새겨져 있다. 영락 10년(400) 기사는 훼손이 특히 심해 70자 남짓이 통째로 읽히지 않는다 — 위에서 긴 □가 이어지는 구간이 그곳이다.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은 아라가야의 수비병으로 보는 견해와, 신라인을 배치해 지키게 했다는 동사 구문으로 보는 견해가 갈린다.
현대어로 읽기
영락 5년 을미년(395). 왕은 비려가 사람을 □□하지 않으므로 몸소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였다. 부산과 부산을 지나 염수 상류에 이르러 그 세 부락 육칠백 영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와 말과 양떼는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수레를 돌려 양평도를 지나 동쪽으로 □성·역성·북풍·오비□를 거치며 국경을 둘러보고 사냥을 하고 돌아왔다. 〔이 자리에 신묘년조가 들어간다 — 5편 참조〕 영락 6년 병신년(396).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잔국(백제)을 토벌하였다. 군사가 □□ 먼저 공취한 곳은 영팔성·구모로성·각모로성·간저리성·□□성·각미성·모로성·미사성·□사조성·아단성·고리성·□리성·잡진성·오리성·구모성·고모야라성·혈□□□□성·□이야라성·전성·어리성·□□성·두노성·비□□리성·미추성·야리성·태산한성·소가성·돈발성·□□□성·누매성·산나성·나단성·세성·모루성·우루성·소회성·연루성·석지리성·암문□성·임성·□□□□□□□리성·취추성·□발성·고모루성·윤노성·관노성·삼양성·증□성·□□노성·구천성이었고, □□□□□ 그 도성에 이르렀다. 잔(백제)이 의에 복종하지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군사를 보내 성을 압박하였다. □□ 소굴로 돌아가 □ 곧 성을 에워쌌다. 잔의 임금이 곤경에 몰려 남녀 포로 1천 명과 세포 1천 필을 바치고 왕에게 스스로 맹세하기를 “이제부터 영원히 노객이 되겠습니다”라 하였다. 태왕은 앞서 저지른 잘못을 은혜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한 정성을 기록하였다. 이에 58성 700촌을 얻고, 잔의 임금의 아우와 대신 열 사람을 데리고 군사를 돌려 도읍으로 돌아왔다. 영락 8년 무술년(398). 명을 내려 별동 부대를 보내 식신(숙신)의 땅과 골짜기를 살피게 하였다. 이때 막□라성과 가태라곡의 남녀 3백여 명을 붙잡아 왔다. 이때부터 조공하고 일을 아뢰었다. 영락 9년 기해년(399).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왕이 평양으로 내려가 순시하였다. 그때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께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과 해자를 부수고 노객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려 하니, 왕께 귀의하여 명을 청합니다”라 하였다. 태왕은 은혜롭고 자애로워 그 충성을 갸륵히 여기고, □ 사신을 돌려보내며 계책을 알려 고하게 하였다. 영락 10년 경자년(400). 명을 내려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에서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그 안에 왜가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자 왜적이 물러났다. □□ 그 뒤를 급히 쫓아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수병 □신라성 □성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성 □ □□ 다하여 □□□ 안라인수병 …〔70자 남짓 판독 불가〕… 안라인수병. 옛적에는 신라 매금이 몸소 와서 일을 아뢴 적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 매금이 □□ 복구 □□□□ 조공하였다. 영락 14년 갑진년(404). 왜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 경계를 침입하였다. □□□□□ 석성 □ 배를 잇대어 □□□. 왕이 몸소 □□를 이끌고 평양을 거쳐 □□□ 선봉이 서로 맞부딪쳤다. 왕의 군대가 길을 끊고 좌우로 찔러 치니 왜구가 무너져 패하였고, 베어 죽인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 영락 17년 정미년(407). 명을 내려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냈다. □□□□□□□□□ 군대가 □□ 합전하여 모조리 베어 없앴다. 노획한 갑옷이 1만여 벌이고 군수 물자와 기계는 헤아릴 수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누성·□주성·□성·□□□□□□성을 격파하였다. 영락 20년 경술년(410).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하지 않았다.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였다. 군대가 여성에 이르자 부여는 □ 온 나라가 놀라 □□□□□□□□□ 왕의 은혜가 두루 덮으니 이에 군사를 돌렸다. 또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관군을 따라온 자는 미구루압로·비사마압로·타사루압로·숙사사압로·□□□압로였다. 무릇 공파한 것이 성 예순넷, 촌 1천4백이었다.
출처
- [단행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 [정부·공공기관]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광개토왕릉비 판독문·역주
이 글은 광개토대왕릉비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