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선거의 주범은 이기붕"이고 "4·19는 이승만의 공"이라는 이중 왜곡
주장
영화는 3·15 부정선거의 주범을 이기붕과 자유당 조직으로 특정하고, 이승만은 부정을 몰랐다고 그린다. 나아가 4·19 이후의 하야를 "국민의 뜻을 받아들인 결단"으로, 심지어 4·19 세대의 저항 정신 자체를 이승만 교육 정책의 산물로 묘사한다.
반박
두 주장 모두 인과를 뒤집는다. 첫째, 3·15 부정선거는 이승만의 4선을 위한 선거였다 — 4할 사전투표, 3인조·9인조 공개투표, 투표함 바꿔치기라는 부정의 설계는 내무부 장관 최인규의 지휘로 전국 행정·경찰 조직이 동원돼 실행됐고, 그 모든 것의 목적은 단 하나, 85세 이승만의 재선과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이었다. 수혜자가 몰랐다는 서사는 12년간 발췌개헌·사사오입으로 권력 연장을 직접 설계해온 통치자의 이력과 양립하지 않는다. 둘째, 하야는 "결단"이기 이전에 항복이었다 —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르고, 4월 19일 경찰 발포로 전국에서 186명이 사망하고, 25일 대학교수단이 시국선언으로 하야를 요구하고, 계엄군마저 시민 진압을 사실상 거부한 뒤에야 나온 것이 4월 26일의 하야 성명이다. 가장 기괴한 것은 세 번째 주장이다 — 독재에 맞서 목숨을 걸고 일어난 세대의 저항 정신을, 그 독재의 공로로 돌리는 것. 이 논리라면 세상의 모든 폭정은 저항을 낳았다는 이유로 칭송받아야 한다. 4·19는 이승만이 키운 것이 아니라, 이승만을 향한 것이었다.
출처
- [기록보존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3·15부정선거, 4·19혁명
이 글은 「건국전쟁」 팩트체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