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인도교 폭파 — "민간인 희생자는 확인된 바 없다"는 주장의 함정
주장
영화와 그 옹호 진영은 1950년 6월 28일 한강인도교 폭파 당시 "신원이 확인된 민간인 희생자는 없다"고 주장한다. 확인된 사망자는 종로경찰서 소속 경찰관 77명뿐이며, 다리 통행이 통제되고 있었으므로 민간인 대량 희생설은 과장이라는 것이다.
반박
"신원이 확인된 민간인 사망자가 없다"는 말은 그 자체로는 사실이지만, 그것이 "민간인 희생이 없었다"를 뜻하지는 않는다 — 이 간극이 이 주장의 함정이다. 급박한 후퇴 상황에서 폭파 후 어떤 인명피해 조사도 이뤄지지 않았고, 시신 수습 기록 자체가 없다. "확인된 희생자"가 적은 것은 희생이 없어서가 아니라 확인 절차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희생을 가리키는 당대 기록은 여럿이다 — 미 군사고문단 장교는 군인·경찰·민간인을 포함해 500~800명 사망으로 추정하는 기록을 남겼고, 폭파 현장에 있던 시카고 데일리 뉴스·타임 등 외신 종군기자들은 다리 위에서 사람들이 폭사하는 장면을 목격 보도했다. 서울기록원 등 공공기관도 "다리 위에 몰려 있던 시민들이 폭파에 휩쓸리거나 물에 빠졌다"고 기록하며, 노들섬에는 희생자 위령비가 서 있다. 나아가 이 논쟁은 폭파의 더 큰 책임 구조를 가린다 — 북한군 주력이 다리에 도달하기 아홉 시간 전에 이뤄진 조기 폭파로 국군 주력과 장비의 퇴로가 끊겼고, 강북의 시민 수십만이 고립됐으며, 책임은 현장 지휘관 최창식 대령 한 사람에게 씌워져 그는 두 달 만에 총살됐다(1964년 재심에서 무죄 — 상부 명령을 따랐을 뿐임이 인정됐다). 조사 없는 참사에서 "확인된 사망자"의 좁은 정의 뒤에 숨는 것은, 진상규명의 부재를 면죄부로 바꾸는 일이다.
출처
- [기록보존소] 위키백과 — 한강인도교 폭파
- [기록보존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강교 폭파사건
- [기록보존소] 서울기록원 — 한강대교의 비극
- [언론보도] 세인트루이스 포스트-디스패치 1950년 6월 28일자 종군기자 보도
이 글은 「건국전쟁」 팩트체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