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베트남에 지상군이 투입되었다. 10년에 걸친 전쟁에서 막대한 폭격이 이루어졌고 이웃 나라들까지 확대되었으며 고엽제가 대량 살포되었다. 결과는 철수였다.
왜 이길 수 없었나. 상대에게 이 전쟁은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오랜 싸움의 연장이었다. 프랑스가 물러난 자리에 다른 힘이 들어온 구조이며, 대영제국 편의 마지막 시점에서 본 「제국이 물러난 자리」의 또 다른 사례다. 압도적인 화력이 그 성격을 바꾸지는 못했다.
국내에서 대규모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같은 시기 인종 분리 철폐를 요구하는 운동이 큰 성과를 거두고 있었고, 두 흐름은 서로 얽혔다 — 밖에서 자유를 말하면서 안에서 차별을 유지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함께 제기되었다. 전쟁에 반대한 목소리 중 상당수가 그 운동에서 나왔다.
한국도 파병했다. 연인원 30만 명이 넘었고 5천 명 안팎이 전사했다. 미국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
파병 결정의 배경에는 두 가지가 함께 있었다. 하나는 안보다 — 주한 미군의 감축을 막으려는 고려가 있었다. 다른 하나는 경제다 — 파병과 함께 경제 협력과 차관, 그리고 군수 조달의 기회가 이루어졌고 그 자금이 이 시기 산업화의 재원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사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지금도 갈린다. 국가의 생존과 발전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평가와, 다른 나라의 전쟁에 청년들을 보낸 것이라는 평가가 맞선다. 이 아틀라스는 판정하지 않는다. 다만 두 가지를 함께 적는다 — 파병한 청년들이 치른 대가가 있었고, 그 대가로 얻은 것도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적어야 한다. 한국군의 작전 지역에서 벌어진 민간인 피해에 대해 조사와 증언, 그리고 법적 판단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일본에 대해 확정된 사실의 부정에 중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 원칙은 우리 자신에게도 같게 적용되어야 한다. 이 시리즈는 열다섯 편 동안 그 원칙을 지켜 왔다.
다른 나라의 전쟁에 참여해 얻은 것을 우리는 어떻게 셈해야 할까? 그리고 그 셈에는 그 전쟁터에 살던 사람들도 포함되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