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황제와 그 뒤에 남은 것

1857 · 인도 델리

1857년 회사 군대의 인도인 병사들이 봉기했다. 새 탄약통에 소·돼지 기름이 발라졌다는 소문이 계기였지만, 그것만으로 번지지는 않는다. 토지 몰수와 왕국 병합, 세금 부담에 대한 불만이 이미 쌓여 있었다.

봉기한 병사들은 델리로 몰려가 82세의 노인을 다시 황제로 세웠다. 시를 쓰던 그 노인에게 실권은 없었지만, 그 이름 아래 모일 근거가 필요했던 것이다. 정통성의 표지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1년 만에 진압되었다. 보복은 극심했다. 마을 단위의 처형이 이루어졌고 델리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황제는 재판을 받고 랑군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아들들은 처형되었다. 1526년에 시작된 왕조가 330년 만에 끝났다.

이 사건을 무엇이라 부를지도 오래 다투어졌다. 영국은 오랫동안 세포이의 반란이라 불렀고, 인도에서는 제1차 독립전쟁이라 부른다. 참여한 사람들의 동기가 하나가 아니었으므로 어느 이름도 전부를 담지는 못한다. 인도 면적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 번왕국 다수가 가담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함께 보아야 한다.

이듬해 회사의 통치가 끝나고 영국 정부가 인도를 직접 다스린다. 회사가 벌인 일의 뒷수습을 국가가 떠맡은 형태였다. 1877년에는 영국 여왕이 인도 여제로 선포되었고, 델리에서 열린 의식에는 무굴 궁정의 의례가 그대로 차용되었다. 무너뜨린 제국의 형식을 물려받아 자기 통치의 정통성으로 삼은 것이다 — 오스만이 로마의 칭호를 가져갔던 것과 같은 방식이다.

그 뒤로 철도와 전신이 놓이고 근대적 관료제가 들어섰다. 동시에 인도의 면직 산업은 무너졌고, 1870년대의 대기근에 대한 대응은 시장에 맡긴다는 원칙 아래 늦어져 수백만 명이 죽었다. 무엇이 들어왔는지와 무엇이 사라졌는지를 함께 적지 않으면 어느 쪽도 정확하지 않다.

한반도와의 직접 접점은 없다. 다만 같은 해 조선은 철종 8년이었고 9년 뒤 병인양요를 맞는다. 그리고 반세기 뒤, 대만과 조선을 통치할 제도를 설계하던 쪽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 경영을 연구했다. 영국령 인도는 그 사례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었다.

왕조가 사라진 뒤에도 우르두어와 음악과 건축과 요리는 남았다. 오늘날 인도에서 그 유산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는 정치적으로 크게 다투어지는 주제다.

한 제국이 남긴 것을 물려받으면서 그 이름은 지우려 할 때, 지워지는 것은 무엇이고 남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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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무굴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