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옮기고, 이름을 지우다

1944 · 일본 나가사키 하시마

전쟁이 길어지면서 동원은 물자에서 사람으로 옮겨 갔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이 조선에도 적용되었고 이듬해 국민징용령이 시행되었다. 초기에는 모집과 알선의 형식이었으나 점차 강제성이 커졌고, 1944년부터는 징용이 전면 적용되었다. 같은 해 조선에서 징병제가 실시되었다.

동원 인원은 집계 기준에 따라 크게 달라 하나의 숫자로 말하기 어렵다. 국내 동원까지 포함하면 수백만 명 규모이고, 일본 본토와 사할린, 남양 군도로 옮겨진 사람들만 따로 세는 통계도 있다. 이 아틀라스는 특정 수치를 확정하지 않고 규모의 범위와 그 편차의 이유를 밝힌다.

확정되는 것은 성격이다. 탄광과 군수공장과 항만 공사에 배치된 사람들이 있었고, 임금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으며, 이동의 자유가 제한되었고, 사고와 질병으로 죽은 사람이 많았다. 이 사실은 기업 문서와 행정 기록, 생존자 증언, 그리고 전후 재판 기록으로 확인된다.

1940년에는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는 조치가 시행되었다. 형식은 신고제였으나 학교 입학과 배급, 취업에서 불이익을 주는 방식으로 사실상 강제되었다.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있다. 일본군이 위안소의 설치와 관리, 이송에 관여했다는 것은 일본 정부가 1993년 조사 결과로 인정한 사실이며, 모집 과정에 감언과 강압이 있었고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도 그 담화에 포함되어 있다. 피해자는 조선뿐 아니라 중국·대만·필리핀·인도네시아·네덜란드 등 여러 지역에서 나왔다. 규모는 자료가 대량으로 파기되어 정확한 집계가 불가능하다.

이 아틀라스에는 원칙이 있다. 확정된 사실의 부정에는 중립하지 않는다. 오스만 편에서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다루며 같은 원칙을 적용했고, 그 원칙은 상대를 가려서 쓸 수 없다고 적었다. 여기서도 같다.

그리고 함께 적어야 할 것이 있다. 동원을 실행한 말단에는 조선인 관리와 구장도 있었다. 협력의 문제는 이 시리즈가 여러 제국에서 반복해 확인한 것이다 — 지배가 유지되는 방식에는 언제나 현지의 협력이 들어 있다. 그것을 적는 일과 책임의 무게를 뒤바꾸는 일은 다르다. 강요된 협력과 자발적 부역도 구별해야 한다.

반대편도 있었다. 조선인 노동자의 처우를 문제 삼은 일본인 변호사와 기자가 있었고, 전후에 자료를 모으고 증언을 기록한 일본 시민들이 있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자료의 상당 부분이 그들의 작업에 빚지고 있다.

한 사회를 하나의 목소리로 볼 수 없다면, 국가의 책임과 그 사회 구성원의 책임은 어떻게 구별되어야 할까?

관련 콘텐츠

이 글은 일본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