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의 순서를 다시 보자. 7월 미국과 일본이 서로의 세력권을 양해했고, 8월 영일동맹이 갱신되며 일본의 한반도 지도권을 확인했으며, 9월 포츠머스에서 러시아가 같은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11월에 을사늑약이 강요된다.
조약에 앞서 국제적 승인이 이미 갖추어져 있었다.
1907년 헤이그에 특사가 파견되었으나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했고, 그 일을 빌미로 황제가 강제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었다.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저항의 성격이 바뀐다. 전국에서 교전이 이어졌고, 진압 과정에서 마을 단위의 초토화가 이루어졌다.
1910년 8월 22일 조약이 조인되고 29일 공포되었다.
이 조약을 둘러싼 법적 쟁점은 분명하다. 대한제국 황제의 비준 서명이 없고, 조인 과정 전체가 군대의 주둔과 강압 아래 있었다. 한국의 학계와 정부는 조약이 처음부터 무효라고 본다. 일본 정부는 절차상 유효하게 체결되었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점에 무효가 되었다고 본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2조는 1910년 이전의 조약들이 「이미 무효」라고 적었다. 영어본은 already null and void다. 한국은 처음부터 무효였다는 뜻으로, 일본은 어느 시점에 무효가 되었다는 뜻으로 읽는다. 국교를 맺기 위해 해석을 덮어 둔 문장이며, 덮어 둔 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통치의 형태도 적어야 한다. 총독은 육해군 대장 중에서 임명되었고 입법·행정·사법과 군대 통수권을 함께 쥐었다. 일본 본토의 헌법이 적용되지 않는 통치였고, 조선인에게 참정권은 없었다. 헌병이 경찰을 겸했고 태형은 조선인에게만 적용되었다.
토지조사사업으로 신고하지 않은 토지가 국유로 편입되었고 그 상당 부분이 일본인과 회사에 넘어갔다. 이 사업이 근대적 소유권을 확립했다는 평가와 소유 구조를 재편해 수탈의 기반을 만들었다는 평가가 함께 있는데, 두 가지는 배타적이지 않다. 제도가 정비된 것과 그 제도가 누구에게 유리했는가는 다른 물음이다.
형식이 갖추어진 지배와 노골적인 정복 중, 무엇이 더 오래 문제를 남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