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08년 한의 군대가 고조선을 무너뜨렸다. 1년 가까이 버텼으나 내부 분열로 끝났고, 그 자리에 낙랑을 비롯한 군현이 설치되었다. 한반도가 제국의 직접 통치를 받은 첫 기록이다.
네 개의 군 가운데 진번과 임둔은 20여 년 만에 폐지되고 현도는 서쪽으로 밀려났다. 낙랑만 오래 남아 400년 넘게 이어지다 313년 고구려에 축출된다.
이 군현들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두고 오래 논쟁이 있었다. 학계의 통설은 낙랑군의 중심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것이며, 근거는 문헌만이 아니다. 평양 일대에서 나온 무덤과 부장품, 관인을 찍은 봉니, 호구 통계를 적은 목간이 그 근거다. 이 자료들은 그곳에 행정 기구가 실제로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와 달리 군현이 요서에 있었다는 주장이 재야에서 반복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그 주장은 위의 고고 자료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 아틀라스에는 원칙이 있다 — 확정된 사실의 부정에는 중립하지 않는다. 일본의 역사 부정 앞에서 그 원칙을 세웠다면, 우리 쪽에서 나온 주장이라고 다르게 적용할 수는 없다.
동시에 짚어야 할 것이 있다. 낙랑군의 존재가 한반도의 역사를 규정했다는 식민사학의 논리도 사실과 다르다. 군현은 한반도 서북부의 일부였고, 그 바깥에서 고구려·부여·삼한이 각자의 국가를 만들어 갔다. 그리고 군현은 지배의 통로이자 동시에 교역과 문물의 통로이기도 했다 — 철과 물자가 이곳을 거쳐 남쪽과 열도로 흘러갔고, 그 교역망 안에서 성장한 세력이 뒤에 백제와 신라가 된다.
군현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것이 이후 역사를 결정했다는 주장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앞의 것을 부정하는 것과 뒤의 것을 받아들이는 것 모두 정확하지 않다.
불편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그 사실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 사이에서, 우리는 어디에 서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