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공을 바친 쪽이 중원이던 시절

-200 · 중국 다퉁 백등산

기원전 200년, 한을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은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흉노를 치러 갔다. 결과는 포위였다. 이레를 갇혀 있다가 겨우 풀려났고, 그 뒤로 60년 넘게 한은 흉노에 비단과 곡식과 술을 보내고 황실의 여인을 시집보냈다.

이 관계를 당시에는 화친이라 불렀다. 그러나 조건을 정한 쪽은 흉노였고, 물자가 가는 방향도 한쪽이었다. 오늘의 말로 옮기면 공물에 가깝다.

우리는 조공을 중원이 받는 것으로 배운다. 그런데 시작은 반대였다. 한이 흉노를 밀어내고 방향을 뒤집는 데 60년이 걸렸고, 그 뒤로도 초원의 세력이 강할 때마다 관계는 다시 흔들렸다. 당은 초원의 칸을 겸했지만, 8세기 중반 이후에는 위구르에게 비단을 대량으로 보내야 했다.

이 시리즈는 처음부터 하나의 원칙을 두고 왔다. 조공은 단일한 제도가 아니라 스펙트럼이었다는 것이다. 청 편에서 그 스펙트럼의 여러 갈래를 정리했다면, 이 편은 그 출발점을 보여준다 — 같은 이름의 관계가 시대와 상대에 따라 완전히 다른 무게를 가졌다.

한반도에도 같은 이야기가 있다. 고구려는 중원의 여러 왕조에 사신을 보내면서 동시에 초원의 돌궐과도 통했다. 백제는 수에 고구려 정벌을 권하는 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에도 통했다. 형식상의 상하 관계와 실제 힘의 관계는 자주 어긋났고, 그 어긋남을 이용하는 것이 외교였다.

관계의 이름과 실제가 어긋날 때,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그 관계를 판단해야 할까? 형식일까, 물자가 오간 방향일까, 아니면 그 관계를 깰 수 있었는지 여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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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당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