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선, 의용수비대, 다케시마의 날 — 1952년부터 오늘까지의 공방

1952 1월 18일 · 서울·독도·마쓰에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선언" — 평화선(일본명 이승만 라인) — 을 선포하며 독도를 그 안쪽에 두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발효(그해 4월)로 맥아더 라인이 사라지면 일본 어선단이 밀려들 것이 자명한 시점의 선제 조치였다. 일본은 열흘 뒤 "다케시마에 대한 한국의 주권 상정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항의 각서를 보냈다 — 이 각서 교환이 오늘까지 이어지는 독도 외교전의 공식 개전이고, 이후 양국은 수백 회의 구술서(왕복 외교문서)로 논박을 주고받게 된다. 1950년대의 공방은 종이 밖에서도 벌어졌다. 한국전쟁의 혼란을 틈타 일본 순시선과 관리들이 독도에 상륙해 "일본령" 표주를 세우는 일이 반복되자, 6·25 참전용사 홍순칠을 대장으로 한 울릉도 청년들이 독도의용수비대를 꾸려 섬에 상주했다(1953~56). 이들은 일본 표주를 뽑고 바위에 "韓國領"을 새겼으며, 1954년에는 접근하는 일본 순시선과 총격전을 벌여 상륙을 저지했다 — 정부보다 민간이 먼저 몸으로 지킨 시간이다. 1956년 국립경찰이 경비를 인수한 이래 오늘까지 독도에는 한국 경찰(독도경비대)이 상주한다. 등대 점등(1954), 주민 등록(1965년 최종덕 이래), 접안시설과 거주 시설 — "실효 지배"라는 법률 용어의 실체가 이 축적이다. 일본은 1954년, 1962년, 2012년 세 차례 ICJ 회부를 제안했고 한국은 프롤로그에서 본 논리로 일관되게 거부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 때도 독도는 끝내 합의되지 않은 채 남았다 — "분쟁 해결에 관한 교환공문"에 독도가 포함되는지를 놓고 양국은 그날부터 지금까지 서로 다른 해석을 유지한다. 2005년, 공방은 새 국면에 들어선다. 시마네현의회가 편입 100주년을 맞아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정하는 조례를 제정한 것이다 — 형식은 지방 조례지만 2013년부터 일본 중앙정부가 차관급 인사를 기념식에 파견하면서 사실상의 국가 행사가 됐다. 이후 일본의 주장은 제도의 옷을 입는다. 학습지도요령과 교과서 검정을 통해 "다케시마는 일본 고유 영토이며 한국이 불법 점거 중"이라는 서술이 초·중·고 전 과정으로 확대됐고(2008년 이래 단계적으로), 방위백서는 2005년부터 매년 같은 문구를 반복하며, 2018년 도쿄에는 영토주권전시관이 문을 열어 상설 홍보 거점이 됐다. 한국의 대응 축은 실효 지배의 심화와 기록전이다 — 1982년 독도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고(현 독도천연보호구역), 2005년 일반인 입도를 개방했으며,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 독도 땅을 밟았다. 동북아역사재단과 연구자들의 사료 발굴 — 이 시리즈가 다뤄온 태정관지령의 재조명이나 NARA 문서 발굴이 그 최전선이다 — 이 조용히, 그러나 가장 단단하게 쌓이는 대응이다. 덧붙여 두 가지 상식 교정. 하나 — "독도는 우리 땅" 노래(1982)의 가사가 여러 차례 개사된 것은 사실이지만(행정구역 개편과 측량치 갱신 반영), 그것은 사실관계를 최신화한 것이지 주장이 흔들린 것이 아니다. 둘 — 한국 정부의 공식 기조는 "조용한 외교"라 불려왔는데, 이는 무대응이 아니라 "분쟁지역화에 말려들지 않으면서 실효 지배와 기록을 쌓는다"는 전략적 선택이다. 이 기조의 타당성을 둘러싼 국내 논쟁(더 단호해야 한다는 요구 vs 국제법정 전략에 말리지 말라는 반론)은 현재진행형이며 — 그 판단 역시 결국, 이 시리즈가 펼쳐온 기록들의 무게를 어떻게 읽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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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독도, 기록의 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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