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 독도폭격사건, 그리고 78년 만에 열린 문서고 — NARA의 기밀 보고서

1948 6월 8일 · 독도 → 워싱턴 근교(NARA)

1948년 6월 8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두 달 앞둔 초여름이었다. 강원도와 울릉도에서 온 어민 수십 명이 배를 나눠 타고 독도 근해에서 미역을 따고 고기를 잡고 있었다. 정오 무렵 하늘에 미 극동공군의 B-29 폭격기 편대가 나타났고 — 독도를 폭격 연습 표적 삼아 폭탄을 쏟아부었다. 바다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공식 집계로 14명이 목숨을 잃었고 여러 명이 다쳤으며 어선 수십 척이 부서지거나 불탔다 — 생존자와 유족들은 그날 독도 근해에 있던 배와 사람의 규모로 보아 실제 희생이 공식 집계를 훨씬 웃돌았다고 오랫동안 증언해왔다. 미군은 조사를 거쳐 유족 배상을 진행했고, 1950년 조난어민위령비가 독도에 세워졌다. 그러나 상처는 끝나지 않았다 — 1952년 9월 미군기의 독도 폭격이 재발했고(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조사 중이던 한국산악회 일행이 폭격을 목격했다), 그제야 독도가 미일합동위원회에 의해 주일미군 폭격훈련구역으로 지정돼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한국 정부의 항의로 1953년 독도는 훈련구역에서 해제됐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 그 답의 조각이 78년 뒤 워싱턴 근교의 문서고에서 나왔다. 2026년 언론 보도에 따르면, 성공회대 전갑생 교수가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2년간 방대한 문서군을 조사한 끝에 1948년 6월 24일자 미 극동공군사령부(FEAF)의 독도폭격사건 기밀 보고서를 발굴했다. 보도가 전하는 보고서의 내용 — 사건 당일 제93폭격전대 소속 B-29 20기가 독도를 표적으로 1,000파운드 폭탄 76발을 투하했다는 작전의 세부와 함께, 다음 문장이 담겨 있었다. "1947년 9월, 독도가 한국의 일부라는 것이 분명히 확립됐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일반에 알려지지 못해 일본의 한 섬으로 인식됐다." 이 한 문장이 갖는 무게를 짚자(이하는 보도 내용에 기반한 평가이며, 1차 사료 전문의 학술 공개와 검증이 뒤따라야 한다는 단서를 달아둔다). 첫째, 참사의 원인 규명 — 미군 상부는 독도의 한국 귀속을 알고 있었으나 그 정보가 현장 부대까지 전달되지 않았고, 폭격 부대는 이 섬을 일본 쪽 무인암초로 여겨 표적 삼았다는 것이다. 14명의 죽음이 행정의 단절이 낳은 비극이었다는 뜻이다. 둘째, 그리고 더 큰 함의 — "1947년 9월에 확립됐다(definitely established)"는 서술이다. 일본이 영유권 주장의 기둥으로 삼는 샌프란시스코 조약(1951)과 러스크 서한(1951.8)보다 4년 가까이 앞선 시점에, 미군 내부 문서가 독도의 한국 귀속을 기정사실로 기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앞 편에서 본 러스크 서한의 "우리의 정보에 따르면 한국의 권리 주장은 없었다"는 문장과 나란히 놓으면 — 1951년 국무부의 "정보"가 자국 군 문서고의 1948년 기록과도 어긋나 있었다는 그림이 된다. 미국의 판단이 1947~48년(한국 귀속 확립)에서 1949~51년(시볼드 개입, 러스크 서한)으로 오면서 어떻게 흔들렸는지를 보여주는 새 퍼즐 조각인 셈이다. 위령비 아래 잠든 어민들의 죽음이, 78년 만에 그들이 조업하던 바다가 누구의 것이었는지에 대한 증언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 발굴이 상기시키는 사실 — 독도의 기록 전쟁은 과거형이 아니다. 문서고는 아직 다 열리지 않았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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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독도, 기록의 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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